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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0

 

채집자

 

그간 나의 작업들은 주어진 생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 열정 이면의 나른함과 피로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보여줘왔다. 에너지 분출과 휴식, 기쁨과 절망, 먹고 자고, 벌고 쓰고 등등 흑과 백, +와 -처럼 두 가지 상반된 개념의 삶이 반복되는 모습이다. 이것은 아베 코보 (Kōbō Abe 1924~1993)의 소설 <모래의 여자>의 차오르는 모래를 매일매일 퍼내야 살 수 있는 소설 속 여자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 삶에 계속되어지는 반복적인 행위들, 어차피 어질러질 집을 치우는 일, 깨끗한 옷을 입었다가 더러워지면 세탁하는 일, 밥을 먹으면 조금 후 다시 배가 고파지는 일, 밤이 지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침의 눈부심 같은 것이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계속된다. 매년 봄 같은자리에 피어나는 아파트의 꽃나무나 여름내내 우글거리던 덩굴이 갑자기 싸늘해진 바람에 바짝 말라버리는 광경 또한 식물의 세계에서 돌고 돈다. 이런 의미에서 식물과 인간이 닮아 있어 예로부터 작품이나 글에서 자주 은유해 왔다. 그러나 나에게는 식물들을 볼 때 한가지 다른 의미가 더 있다. 피로한 삶속에서 문득 만나는 우거진 식물의 장면들은 다이빙하듯 빠져들고 싶은, 그리하여 쳇바퀴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소극적 도피의 공간으로 느껴진다. 한가지 종류의 꽃들이 주변으로 씨를 뿌려대며 군락을 이루는 모습은 또한 우리들이 아웅다웅 살아가는 군중의 얼굴들 같기도 했다. 나는 식물을 촬영하여 그것을 화면 가득 잘라 붙이거나 하여 어느 하나도 주인공처럼 보이거나 하지 않도록 잔잔한 화면을 만들고자 하는데 그것이 곧 풀로 만든 수영장 혹은 호수의 물결처럼 보이도록 의도했다. 최근 큰 작업을 자꾸 하려는 이유도 내 키보다 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떤 숲이면서 너른 물에 풍덩 빠져드는 상상을 할 수 있도록, 내 몸을 온전히 그곳에 숨길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그 안은 거친 터치들로 가득 차 있는데 멀리서 보면 참으로 보드라운 들판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귀찮은 벌레와 해충이 있고 생각보다 거센 바람이 불어 사정없이 흔들리는 풀들을 생각하니 물감을 던지듯 강한 어조로 그리게 되었다. 나는 내 그림을 보면서 사람들이 ‘풀멍’의 순간을 경험했으면 하는데 사람들이 모닥불이나 파도가 철썩이는 것을 보면서 멍해지는 것처럼 반복적인 이파리나 꽃들이 바람에 맞추어 춤을 출 때 그 앞에서 복잡했던 생각들을 멈추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정확히 응시하고 판단해야만 하는 순간들의 연속에서 잠시 벗어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이번 전시에 보여지는 식물 그림들은 제주, 서울 혹은 안동을 오가며 보아온 나의 작은 조각 우물들이다. 전시제목처럼 길을 다니며 채집을 하듯 내가 다이빙할 수 있는 작은 풀숲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네모 화면안에 가지와 이파리가 복잡하게 우거진 식물이 가득하도록 찍은 후 앞서 말한 것처럼 조금씩 비어 있는 곳은 꼴라쥬로 더 균일한 화면을 만든 뒤 드로잉을 하고 화면에 옮긴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별히 꽃이 아니라 말라버린 겨울 나무를 화면에 옮겨보는 시리즈를 보이게 되었다 <Tree Abstract Study>. 초록이 사라진 겨울의 숲을 보다 보면 오히려 색으로부터 자유함을 느끼게 되는데 나무의 몸은 핑크 빛이거나 마른 이파리는 푸른 혹은 보라 빛으로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전시제목인 ‘채집자’ 의 의미는 사실 이렇게 풍경을 채집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공중에 떠도는 상상을 낚시꾼처럼 낚아서 화면에 옮기는 사람으로서 의 채집자의 의미도 있다. 도피의 우물을 파는 작업과 하는 동시에 우물밖의 세상은 어떠 한가 내다보기 마련인데 그럴 때는 링 위의 권투시합을 보듯 나는 철저한 관찰자로서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물 같은 작업실에 고여있는 나 자신과 또 복잡한 바깥의 이야기들 사이에서 여러가지 상상을 하게 되는데 그때 그때 떠오르는 재미난 이미지들을 하나씩 드로잉 하고 한데 모은 것이 <장미극장> 시리즈이다. 2021년에 히에로니무스 보쉬( Hieronymus Bosch 1450-1516)의 세 폭 제단화 <쾌락의 정원>의 가운데 패널을 오마주 하여 첫번째 장미극장을 2021년에 그려보았고 이번에 두번째를 그리게 되었다. 보쉬의 그림은 항상 보는 즐거움이 있어서 이번에는 그의 또다른 그림 <건초 더미>를 오마주 하여 우물 밖의 이야기를 우스꽝스럽게 연출해 보았다. 작업할 때 듣는 여러가지 시사나 정치 그리고 사람사는 이야기 들을 연극의 짧은 에피소드처럼 곳곳에 배치하였다. 건초라는 쓸데없는 사물이 무엇이 또 있을까 생각하다가 개털을 생각했다. 구름 속 하나님의 자리에는 개를 그려 넣었는데 가끔 우리집 반려견의 표정을 보면 나를 보며 한숨을 푹 쉬는 것이 인간들을 한심해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각 계의 사람들, 시민들, 정치가, 노동자, 군인 그리고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말 못하는 개와 개털수레에 매달려 개털을 한줌이라도 더 집어가려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의 <아르놀피니의 결혼 The Arnolfini Portrait >이나 벨라스케스(Velázquez, 1599~1660)의 <시녀들 Las Meninas>에서 화면안에 화가자신의 모습을 넣었던 것처럼 채집자인 해녀의 모습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 모습도 한쪽 구석에 그려넣음으로 이 보고자의 주체를 확실히 한다.

 

채집된 우물작업들은 내 자신의 내면으로 깊숙이 침잠하는 행위이고 장미극장과 자화상 과 같은 작업들은 수면위로 올라와 관찰한, 나를 포함한 다양한 인간보고서이다. 침잠과 관찰, 주관과 객관 두가지를 반복함은 매일 빨래를 돌리거나 모래를 파내는 것처럼 작가로서의 입장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반복 행위 같다. 물속에 있을 때는 치열한 삶을 맞이할 준비와 충전을 하는 것 같고 수면위로 떠올라 놀라운 장면들을 직관하고 기록하는 것이 나의 채집생활이다.

 

제주에 있다 보니 서울보다 사람을 덜 만나게 되어 주로 SNS 나 유튜브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담 넘어 구경하며 그것과 나와의 관계를 인지하는 결과물과, 한편으로 내 눈앞에 보이는 실질적인 것들을 가지고 소소한 채집놀이를 하며 이곳의 작은 우물들을 힘있는 붓질로 담은 화면들로 이 전시가 꾸려졌다. 두 가지의 작업은 사뭇 달라 보이지만 이것도 저것도 부인할 수 없는 나의 모습이며 나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우물안에서만 살수 없고 우물 밖에서 만도 살 수 없는 이 시대 그림쟁이의 현실로 느껴진다.

202310                                 

 

The Gatherer

 

In many ways, my works have depicted people living their given lives to the fullest, and the lethargy and fatigue beneath their passion. It is a repetition of two contrasting notions of black and white, plus and minus – energy and rest, joy and despair, consuming food and sleeping, earning and spending. This brings to mind the woman in “Woman in the Dunes” by Kōbō Abe (1924-1993), where she must shovel away the sand that accumulates every day. The repetitive actions in our lives continue on regardless of our will, such as cleaning the house that would inevitably become messy, wearing clean clothes only to wash them when dirty, getting hungry after a short while from a meal, or the bright sunshine after night. This is also prevalent in the world of plants, in how flower trees in apartment complexes that bloom at the same place in spring, or how ravishing vines with branches spread wide in the summer are quick to wither with the slight chill in the air. In this aspect, plants and humans are alike, for which many works of art and literature have presented them in metaphors. However, there is one other meaning for me when looking at plants. Scenes of luscious plants I wander into in daily life feel like places of passive haven, places I want to dive into to step out of that ever-spinning treadwheel. To me, one type of flower that spread its seeds to its surroundings to create a plant community resembled the faces of the people and how they live close together. I took photographs of plants for a collage that filled the screen with the intention of creating a calm surface where no plant would be the protagonist, almost like the ripples of a swimming pool or a lake made of plants. The reason I am trying to create large works is to present a space that would allow me to hide my entire body, to invoke the imagination of diving into a forest or a body of water, deep with its depth unknown.

 

Yet, this space is filled with rough touches. From a distance, the meadow looks smooth, but up close, there are pesky and harmful insects, and the grass sways uncontrollably in the rough winds. I chose rough touches, almost as if I were throwing paint, because of this image. I wish viewers would experience the moment of “grass-gazing” with my paintings. Like how we stare mindlessly at the sight of a crackling bonfire or crashing waves, I wish for viewers to stop making their minds busy and instead escape the parade of moments of constant acute observation and decision.

 

The plant paintings featured in this exhibition are little wells I have observed going back and forth among Jeju, Seoul, and Andong. Like the title, I have gathered little bushes I can dive into on the road with my camera. I fill the rectangular screen with the plant with its ravishing branches and leaves. With the empty spaces, I collage it for a more balanced scene, and move it to the canvas. Especially in this exhibition, I am showcasing “Tree Abstract Study”, a series focused on withered trees in the winter instead of flowers. When looking out to a winter forest without a trace of greenery, I feel I rather have a sense of freedom from colors. The tree trunks would display a pink hue, or dry leaves a bluish or purple hue.

 

The meaning behind the title of the exhibition, “The Gatherer,” indicates not only the gathering of scenery, but also the individual who catches roaming imaginations and transfers them onto the canvas. As I dig deep my well of escape, I am inevitably drawn to the state of the world outside. In that process, I am wholly an observer to view society outside, much like a spectator in a boxing match on the ring. I fill the gap between myself deep inside the well that is my studio, and the numerous many complex stories outside with many imaginations. The “Rose Theatre” series is the collection of the many intriguing images I had drawn from that pool of imagination. I painted the first “Rose Theatre” piece in 2021 as an homage to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by Hieronymus Bosch (1450-1516), particularly the middle panel of the triptych. Now, I have created a second piece in the series as an homage to Bosch’s another work, “The Haywain,” almost as a satirical take on the stories outside the well. I have placed the material I listen to while creating the work - many current events, political aspects, and many stories of individuals – all around the piece like short episodes in a play. On thinking of a useless material like hay, I thought of dog hair. In place of God in the clouds, I drew in a dog. This is because the face of my pet dog sighing down at me felt like she felt pity toward humans. The work depicts people from all walks of life, citizens, politicians, workers, soldiers, a dog that cannot speak replacing God, and people clinging to a cart of dog hair, struggling to grab more hair. To clarify the identity of the reporter for this piece, I have placed myself on canvas as a gatherer, a “haenyeo” who is drawing, much like how artists place themselves on canvas, like Jan van Eyck (1395-1441) in “The Arnolfini Portrait” and Velázquez (1599-1660) in “Las Meninas”.

 

The collected well works represent an inwards action of me sinking deep within myself. Works like “Rose Theatre” and “Self Portraits” are reports on the surface of various people, including myself. The repetition of withdrawal and spectating, subjectivity and objectivity, feel like obligatory actions for an artist to maintain an artistic stance, much like washing clothes every day or digging out sand. My gathering lifestyle is preparing and charging up for a fierce life underwater and observing and recording spectacular scenes on the surface.

 

Living in Jeju allowed me to meet fewer people than back in Seoul. I would be watching behind a wall how the world is through social media and YouTube. This exhibition is a collection of the result of realizing the relationship between myself and the stories of the world, and also of little wells in strong touches of the brush – of my peculiar gathering of real objects in front of me. The two styles look quite different, but both are undeniably myself and the language I speak. Such is the reality of contemporary artists, who cannot wholly live inside or outside the well.

 

 

2022.10

풀의 춤

사람과 식물

 영원할 것 같았던 녹음이 잠깐의 찬바람을 못이기고 이파리가 우수수 떨어지는 이런 식물 격동적 싸이클의 반복은 인간계의 시간 흐름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하는 아주 효과적인 비유적 대상이다. 나는 식물을 다루는 작업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감정의 희로애락 그리고 그 반면 놓칠 수 없는 인간의 한결 같은 삶의 의지나 에너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 작품은 삶과 밥과 살림, 가족과 멀지 않다. 매번 찾아오는 배고픔과 끼니를 챙기는 것,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면 졸려 잠에 들고, 햇빛에 눈이 부셔 일어나는 이 모든 것이 진심으로 집 바깥의 비바람을 맞는 어떤 나무의 하루와 같은 삶이라 생각된다. 어느 날은 내 손바닥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그 안의 손금이라 불리우는 주름들이 푸르른 이파리의 잎맥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하며 지낸다. 요즘은 5월 길가에 금계국이 잔뜩 피었다. 바람에 몸을 맡기며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들은 더더욱 작은 말 한마디에도 마음이 휘청이는 나와 닮아 있다.  

작업의 방식

작업은 이런 생각을 시작으로 빼곡히 가득 찬 꽃무리를 화면 가득 채우는 방식부터 인간과 식물의 초현실적인 접목도 동시에 시도하고 있다. 이번에 작업한 <42개의 봄조각>은 한 화면을 40여개로 조각 내어 반복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화면을 채우는 대상 또한 하나의 큰 모양을 갖기 보다는 작은 존재들의 반복인데, 나란히 자라난 식물들의 불규칙적이면서도 규칙적인 모습은 매일을 똑같이 살아내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조각난 꽃밭그림은 내가 태어난 달인 4월에 가장 훌륭한 장관을 보여주는 유채로 선택했고 태어나 지난 봄까지 42번의 유채가 피었을 것이다. 그래서 42개의 캔버스를 붙인 상태에서 꽃이 붙어있는 거대한 땅덩어리를 그리면서 내 자신을 42개로 조각 내어 담는 느낌이었다. 나 자신을 정육 하는 이 느낌은 저녁식사에 올라온 한 마리의 고등어를 4명의 가족에게 나누어 주는 행위나 커다란 소와 돼지의 몸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이 내 입으로 들어가는 상황도 떠올리게 하고 나의 분신인 내 그림을 42조각내어 한 모퉁이만을 갖게 되는 어느 컬렉터의 상황도 동일시해본다. 급변하는 세상속에서 실물을 갖게 되지 못하는 주식이나 NFT, 코인과도 같은 사회 시스템속에서 부분이자 전체의 ‘물성’을 갖게 해보는, 무능한 그림쟁이의 소심한 의도 이기도 하다.

 

42개의 완벽하지 않는 조각들의 모음은 나의 인생을 긴 선으로 그었을 때 그 중간 어딘가를 가리키는 (지)점이자 (화)면이 될 것이다. 네모를 벗어난 이 불완전한 모양의 그림으로 앞으로의 계속될 시간을 예측하고 우연히 잘려진 조각그림들이 모여 전체의 실루엣을 만들어주는 상황을 통해 불안전한 개인과 가정이 모여 불완전한듯 아닌 듯 울퉁불퉁 세모바퀴로 나아가는 우리의 사회도 떠오르게 할 것이다. 사람은 늘 완전함을 꿈꾸며 불안해하지만 우연히 잘려진 작은 조각 그림의 내부는 또다른 전체로 보여지는 것이다. 우리가 외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안에 또 다른 작은 세계가 있듯이 말이다 

2021.9

땅이 부르는 노래

 

식물과 사람

그간 나의 작품에는 고기 식물 계란 연필 촛불 장미 등 여러가지 사물이 등장한다. 그런 사물들을 통해 사람사는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그려왔다. 최근 몇 년 전부터 식물과 사람에 대해 생각을 해왔는데 땅 위에 식물들이 와글와글 자라나는 그 모습들을 볼 때면 마치 출근길 사람들처럼 부지런해 보였던 것이다. 물을 빨아올리고 뜨거운 태양을 따르고 비바람을 견뎌내는 모습은 우리의 매일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또한 보도블럭을 들어올릴 만큼 무지막지한 힘을 자랑하다가도 찬바람에는 영락없이 이파리를 떨구는 식물들의 모습을 보면, 무엇이든 못할 게 없는 인간들의 능력과 그 반대로 생각보다 별거 아닌 것에 주저앉는 사람들의 모습이 교차하는 것이다. 식물과 인간 그 둘은 이렇게 너무 닮아 있다. 요즘 나는 제주에 살고 있는데 그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들의 모습은 좀더 원초적이다. 꾸미지 않고 벌거벗었는데 더 자유한 얼굴들 이랄까. 뻗은 가지가 가지고 있는 선과 이파리의 반복적인 형태가 내뿜는 자유로운 풀의 모양새는 나에게 시각적유희를 주기도 하고 바쁜 일상을 잠시 멈춰주는 힐링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요샛말로 풀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몇 가지 컷을 사진으로 추출한 다음에 회화로 옮기는 작업을 통해 그 풀더미들이 붓질과 색으로 남아있게 함으로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식물의 바라보는 순간을 기록해 보았다.

아주 빼곡히 피어 있는 땅 위의 꽃들은 카페트같이 벌거벗은 붉은 땅을 가려주고 있는데 그 꽃을 전면에 내놓기 위하여 식물들의 메커니즘이 얼마나 바쁘게 돌아가는지를 생각했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의 성공 뒤에 감춰 있을 처절함을 상상케 하는데 그것이 식물이나 인간이나 얼마나 수고로운 일인가 싶어 가끔은 잘 살아내느라 애쓴 식물들에게 상을 주고 싶기도 했다. 극한의 상황에도 씩씩함을 잃지 않는 식물의 초상(Portrait)을 그리는 일은 내게 마치 한 인물의 인생을 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난봄 바닷가 옆 돌사이를 파고들어 우악스럽게 자리한 어떤 풀을 보았는데 사람으로 치면 꼭 식당일을 하여 삼남매를 성공적으로 키워낸 홀어머니 같았던 것이다. 이렇듯 이 땅 위에 재잘대는 여러가지 식물의 이야기는 악보없는 노래가 되어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Sep.2021

Melody of Earth

 

Plants and people

During the years Meat, Plants, Eggs, Pencils, Candles, Roses have appeared in my artwork. I have expressed stories of people metaphorically through these objects. In the recent years, I have thought about the resemblance between plants and people and the way plants swarm out of the earth always seems to me like people going to work diligently. Sucking water out of the earth, feeding off the hot sun, and enduring the wind and rain does not seem that much different. As they have enormous power to lift pavements and yet so fragile the leaves tremble from the cold wind is very alike with the limitless potential of the ability of people but also so vulnerable to small matters. This is how plants and people are so alike.

I am living in Jeju these days and the plants that I observe here are more basic. They seem less decorated and naked but free. The liberal appearance of plants coming from the lines of the branches and the repetitive form of leaves give me visual amusement and also is a time of healing from busy everyday life. I would say it would apply to the trendy terminoloy "Poolmeong".  So, I have captured the beauty of plants waving in the wind with my camera and I have transferred this to my canvas with my brush and colors.

Flowers cover the red earth as if they are a carpet and this gets me thinking about how the mechanisim of flowers work so endlessly to let this be. This can be compared to the desperation behind the success of people and therefore I would have liked to reward plants for its dedication to live on. Painting portraits of plants that are valiant in even the most extreme situations came to me as painting the life of a person. Last spring, I saw a plant wiggling out roughly between rocks on the seashore and this made me think of a single mom working in a diner to take care of her three children. As such, the stories of plants from this land can be heard all over as music without any script.

2020.4

풀  불  물

몇 년 전 돌아가시기 직전에 마주한 할머니의 모습은 마른 풀 같았다. 정신이 오락가락한 할머니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다 보니 얼마 전 형편없이 시든 꽃을 쓰레기통에 넣기 위해 화병에서 들어올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촉감과 이 촉감이 매우 흡사했다. 그리고 늘 흠모해왔던 바니타스의 그림들이 스쳐갔다. 인간의 삶을 빠르게 돌려보기 하는 것 같은 낙화의 과정을 한 화면에 담고 싶었다. 그리고 지우고를 반복하는 과정은 우리가 매일을 살아내는 일과 무엇이 다를까.

 

어제 그렸던, 좀 더 피어있던 모습을, 오늘은 지워내고 다시 그 위에 지금의 하루를 기록했다. 그림을 지워내는 일은 어제의 공든 탑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 같은 그런 안타까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자꾸 희미한 것을 원했던 것 같다. 지나간 어제처럼 우리의 내일도 분명한 것이 없으니.

 

<풀 불 물> 이라는 전시 제목은

길가에 빽빽했던 풀숲이, 겨울에 바람이 드나들도록 텅비어버리는 순간.

그리고 생일 초에 불을 붙이기 위해 피어오른 잠깐의 성냥개비.

그리고 건조한 할머니의 몸뚱이를 생각하고 부르기 편한 순서대로 놓았다.

그 세 가지는 모두 일시적이라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2019.2

광화문 사냥꾼

 

오전 8시 45분

수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입구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들은 한결같이 어두운 양복바지와 허연 와이셔츠, 비슷하게 생긴 자켓을 걸친 채 출근을 한다. 잠시 뒤 점심시간이 되면 무채색의 사람들이 또다시 와르르 밥을 먹으러 나오는 것이다. 1시간 안에 식사를 구겨 넣고, 이를 쑤시며 다시 각자의 일터로 들어간다. 나는 일터에 나와있는 모든 이들이 사냥꾼으로 생각되었다. 우리네 세상이 이렇게 발달하기 전 사슴사냥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 원시의 사회가 있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돈을 사냥하지만 그 돈으로 산, 팩에 담긴 붉은 소고기를 보면 ‘사냥’이라는 원시적인 개념이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둘째를 낳고 얼마 안되어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할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움집에서 젖을 주는 여자. 그는 창을 매고 사슴을 잡으러 나가는 남자 정도로 느껴졌다. 잘 다려진 와이셔츠와 양복바지. 그리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맨 넥타이는, 피가 난무한 사냥터에서 창과 칼로 무장한 사냥꾼의 모습이리라. 그가 사냥을 나간 사이 나는 벗어 던진 매일의 와이셔츠를 빨고 다리고, 마트에 가서 과일과 고기를 산다.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심사숙고하여 고른 구이용 소고기의 아름다운 마블링은 내 눈을 즐겁게 한다. 그 마블링에서 나는 미적 희열을 느꼈다.

정육을 하다 보면 소의 부위별로 보여지는 단면이 매우 다른데 그것의 조형미는 한 폭의 멋진 추상화 같았다. 나는 잦은 세탁으로 목주위가 낡아 버리게 되는 와이셔츠, 유행이 지난 넥타이나 양복들을 직장인들에게서 수거하여 무기를 만드는 작업을 했었는데, 양복에서 유일하게 화려한 부분인 넥타이에는 아름다운 고기의 마블링을 수놓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수를 놓는 일은 마치 매일 없어지는 밥을 만드는 일이나 매일 빨아야 하는 속옷이나 그런 매일의 지루한 노동같은 죽도록 단순한 일이었다. 그런 단순한 노동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패턴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부와 명예, 그리고 마음속 깊이 자리한, 이루지 못한 꿈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고생한 날 저녁, 잘 구운 한점의 고기가 목구멍에서 사라지듯이 매일의 출근, 매일의 살림, 매일의 노동은 그렇게 하루하루 모래바람처럼 날아가 버리고 있다. 나의 자수라는 작업방식이 이러한 모래바람을 기억하는 일이 되었으면 한다.

2015.9

무장가장 武裝家長

던적스러운 삶 가운데서

이 사회의 최소단위인 가정이 굴러가기 위해 부지런히 돈을 버는 가장 家長들이 있다. 그것이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그들은 이 사회와 문화가 그들에게 떠맡긴 알 수 없는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기계적인 출근을 하고 그 안에서 상대방을 밟고 올라가야만 살아남는 잔인한 구조에 떨어지게 된다. 그것이 정말 내가 원했던, 혹은 나를 위한 싸움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 너덜너덜 투쟁을 하고 지친 몸을 끌고 돌아온다. 집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먹는 입' 食口들이 노동의 대가인 돈으로 음식을 먹고 배불러 지지배배 댈 때 비로소 야릇한 성취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가장 家長은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겠지만 남성의 양복은 여성의 정장보다 매우 보수적인 형식과 색상 안에서 디자인되며 계절을 느낄 수 없고, 특히 목에 매는 넥타이를 꼭 해야만 선물포장의 리본처럼 비로소 정숙함이 완성 된다는 점에서 더욱 상징성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토록 정숙한 의상을 입고 우리는 죽지 않고 이 생을 이어나가기 위해 얼마나 던적스러운가. 그렇다고 어디로 도망 나갈 방도도 없는 채 그 '죽여야 사는 구조'에 우리가 갇혀 있다.

 

 

여기 몇 가지 아이러니가 있다.

 

벗어나길 원하나 벗어나지 못함

정숙한 모습이나 정숙하지 못함

죽이고 싶지 않은데 죽여야 함

죽이고 있지만 물리적인 살인이 아님

내가 일하지만 일을 해야 하는 필연성을 강요당하고 있음

내가 일하지만 자아가 없음

 

과 같은 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살상을 하는 무기의 모양으로 돈을 벌기위해 필요한 전투정신을 말하되. 어떠한 상처도 줄 수 없는 무기력한 무기들의 질감으로 그 아이러니함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연민하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혹은 '우리 이제는 좀 다를 수 없을까' 라는 애통한 마음을 섞어서 많이 부드럽고 폭신하고 뚱뚱하게 만든다. 바지의 칼주름은 곡선을 그리며 늘어진 대포로, 정갈한 실크넥타이는 껴안기 좋은 크기의 보드라운 권총으로. 칼은 완전히 방전되어 축 쳐진 퇴근길의 직장인처럼 온전히 서있지도 못하게 그렇게. 더 격렬하게 쓸모가 없는 무기들이다.

In our despicable lives

 

There are breadwinners who work hard and diligently to sustain their family, which is the smallest unit of society. Whether the breadwinner be a man or a woman, they go to and from work mechanically andsolely with the responsibility and obligations imposed upon them for unknown reasons, and fall into an atrocious structure in which they must trample othersin order to survive. They come back home with distressed bodies totally worn out from a battle without knowing if they engaged in it because they really wanted to, or if it was theirs to fight in the first place.However, a strange feeling of achievement and relief fill them when they see the ‘hungry mouths’ waiting at home are finally stuffed with food and starts chirpingwith satisfaction with the reward money earned from hard work.

 

The breadwinners can be a man or a woman, but if you look at the suits for men, they are designed in a very conservative manner and color when compared to those for women. In addition, one can’t find any trace of seasonal changes in them. The very fact that a necktie must be worn in order to finish the virtuous looks of a suit as if a ribbon on a nicely packaged gift, had a strong symbolic meaning to me. How rigid and doggedare we to wear such a serene attire and continuestruggle through the harsh everyday lives in order to resist death? We are trapped in a ‘structure where you kill to survive’ with no possible way out.

Here are a few ironies that came to my mind:

 

Wanting to escape but can’t;

Seemingly virtuous but isn’t;

Not wanting to kill but have to;

Is killing but isn’t a physical murder;

Am working but is actually being forced to do so by its inevitability;

Am working but is actually unconscious of ‘self’; and so on.

 

In order to express the ironies that came to my mind and the combative mindset needed to earn money in the form of weapons that actually kill people, I tried to make use of the element of texture of helpless weapons. Perhaps I was deeply distressed and upset, wondering why we can’t ever break away and change the situation we are in. I tried as much as possible to make them soft and fatty, expressing the knife pleats of the trousers in the form of a cannon stretched out in a curved line and the fine silk necktie in the form of a soft rifle small enough to hold in the arms. The sword can barely stand on itself, just like the exhausted employees going back home from work, totally useless and help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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