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critics

2023. 10

꽃과 바람을 동시에 그리기, 해열제적 감성으로

 

 

심상용(서울대학교 미술관장)

 

 

“바라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의미다.”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1]

 

 

 

해열제적 감성

 

이전에 허 보리는 옷가지를 이어 만든 연성 무기들을 만들었다. 포신이 흐물거리는 탱크와 폭신폭신한 수류탄..., 교화된 살상무기, 제구실을 못 하는 부조리한 무기체계였다. 늘상 그렇듯 허보리는 근대 이데올로기나 제국주의 문명 비판 같은 거대담론을 소환하지 않아도 된다고 당부한다. 어렵거나 심오한 해석을 대는 것에 무참하게 길들여진 감상자들을 당황시키면서 그는 자신의 그림의 내용에 대해 말한다. “주어진 삶을 치열하게 사는 사람, 열정과 열정의 고갈, 피로감 ... 먹고 자고, 벌고 쓰고... 반복적인 행위들, 이내 어질러질 집을 치우는 일, 깨끗한 옷을 입고 세탁하는 일, 밥을 먹고 다시 배고파지는 일”

허 보리의 세계는 늘 이러하다. 뜨거운 서사, 영웅담, 이데올로기나 주술, 과장된 감정, 지적 허세를 허겁지겁 주워 담기와 무관하다. 그는 아주 작은 되풀이되는 주어진 일상에서 시작한다. 무의미한 굴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곤 하는 것들, 남편의 넥타이며 가족의 옷가지들을 채집하는 일 같은 것, 그리고 네모난 캔버스를 그 안에 가족이 함께 하는 네모난 아파트의 메타포로 인식하는 과정을 반드시 경유한다.

언제 삶에 알맹이가 들어차는가? 헨리 나우엔(Henri Nauen)은 작은 일에 충실할 때, 계절이 바뀌듯 반복되는 일, 아무 의미도 없고, 도움도 안 되는 것 같은 일들을 통해 그렇게 된다고 답한다. “삶 속에 새로운 공간이 열리고, 내성(內省)의 긴 여정에 오르게 된다.” 허보리의 그림 그리기의 내부로 통해있는 이야기다.

허 보리의 그림 그리기는 채집(採集)과 많이 닮아있다. 그는 아베 고보의 소설 『모래의 여자』를 예시한다. 고보에 의하면, 채집은 소박하고 직접적인 기쁨을 준다. 새로운 종을 발견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맥락에서 허 보리의 채집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채집의 대상이 (곤충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반추하게 해 줄 작은 거울 조각들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고보는 소설 속, 취미가 곤충 채집인 실종된 주인공에 대해 언급한다. “어엿한 어른이 되어서도 새삼스럽게 곤충 채집 같은 일에 열중하는 자체가 정신적인 결함의 증거다.” [2] 소설은 채집과 사뭇 극단적인 정신적 결함의 징후들의 상관성에 대해 논한다. 그림 그리기 자체도 필연적으로 어떤 존재 내적 결핍을 깊이 인식하는 일과 맞닿아 있는 일이다. 허 보리에게 채집은 도피와 해방의 상상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는 상상을 낚는 채집꾼이지만, 낚시터는 그의 일상이다. 어떤 일상인가? 과도하게 각진 아파트와 ‘도피의 우물’인 작업실이 중심인 일상이다. 피곤하고, 가라앉고, 도피하고 싶은 그곳에서 그는 그날의 상상을 낚는 채집꾼으로 산다. 삶의 참신한 공간을 생성하는 내성(內省)의 긴 여정에 다시 오른다.

 

 

꽃은 곧 성사(聖事)다!

 

허 보리는 더 많이 꽃을 그린다. 그것은 곧 더 많이 사람을 그린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꽃은 인간을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꽃이나 사람이나 삶을 사는 일은 수고로운 일이다. 꽃의 수고도 만만치 않다. 한껏 물을 빨아올리고, 태양을 따르고 비바람을 견딘다. 그 유한성 또한 다르지 않다. 어느덧 찬 바람이 불면 스스로를 버릴 때가 왔음을 알고 수용한다. 그렇게 피어나고 시들어갈 한 송이 꽃이기에 더욱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된다. 사람도 삶의 순간들에 주저앉고 세월과 함께 사위어 간다.

허 보리는 꽃과 풀이 제공하는 변함 없는 선(善)에 놀란다. 우리는 주로 어둠에 놀라는 경향이 있다. 매일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전염병, 전쟁, 살상, 살인, 비참함, 비속함, 끔찍함, 소스라치는 어둠의 쇄도에 놀란다. 하지만 정작 놀라야 하는 것은 비참성의 한가운데서 여전히 스스로를 피워내는 꽃이다. 허 보리가 꽃과 풀에서 발견하는 위로의 근원이 바로 이 힘이다. 유구한 세월 손상 없이 간직된 성스러움이다.

그렇기에 허 보리에게 꽃과 식물은 규정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앞에서 그로 인해 내가 규정되어야 하는 부름이다. 그의 작은 꽃 그림들은 정물화가 아니다. 그의 큰 꽃 그림들은 풍경화와 같은 장르가 아니다. 꽃은 관찰해야 하는 대상(it)이 아니라 사랑해야 하는 상대(you)고, 궁극적으로는 그 앞에서 제대로 자신과 마주하는 성사(聖事)다. 그곳으로 몸을 던져야 하는 성소(聖所). 53x45cm 크기의 <다이빙>을 보라.

 

* 미학의 재정의: 꽃은 사랑받을 만한 것들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미학은 이 원형성의 사유와 그것의 발견에 관한 학문이어야 한다. 표현은 사람과 사물에 깃든 그 가능성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고도의 정신 행위여야 한다. 성사(聖事), 곧 예배여야 한다. 이 점에서 서구 근대미학의 노정은 크게 공허했다.

 

* 미술사 다시 읽기 : 이 선(善) 앞에서라야 꽃 앞에서 지난 세기 조형미학의 과오가 제대로 계량된다. 특히 대상의 추방을 주창했던 모더니즘의 무지의 강령들, 그 안에서 꽃과 풀이 추방되어야 할 것들의 목록에 오르는 플라톤의 이분법이 제대로 각성된다. 회화는 대상계에서 분리되고, 그렇게 되자 감각이 둔화되고 사유의 긴장감이 현저하게 느슨해졌다. 그렇기에 꽃을 그리는 것이 단지 추상 대신 구상을 선택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꽃은 끝없이 겸손하게 하고 돌이키게 한다. 그 안에는 식물을 부재로 돌리고 전복하는 미학, 부조리 미학, 포스트(post)를 접두어로 시작하는 웃자란 담론들에 대한 성찰이 있다. ‘포스트 플라워(post flower)’나 ‘후기적 꽃’ 같은 조어를 생각하면 저절로 헛웃음이 나온다.

 

 

 

꽃과 바람을 동시에 그리기

 

허 보리는 꽃과 바람을 동시에 그려낸다. 살아있는 꽃을 화병에 꽂혀 있는 꽃처럼 그려서는 곤란하다. 세계와 무관한 조화(造花)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면, 꽃에 깃든 햇볕과 들녘의 바람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꽃과 꽃대를 흔드는 바람결을 분리시키지 않아야 한다. 꽃의 숨과 풀의 호흡을 포착해 동시에 표현해야 한다. <메밀 추상>처럼, 메밀꽃으로 뒤덮인 너른 들판을 캔버스 가득 그릴 때는 그러한 회화성이 더 농익어야 한다. 허 보리가 그린 메밀 꽃 들녘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모성애(母性愛)로 품어낼 줄 안다. 바라본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회화 기법이다.

삶의 고단함에서 도피해 잠시 숨고 싶은, 헝클어진 마음을 받아내는 회화, 이를 위해 터치는 묘사와 서사의 중독, 설명과 증명의 강박에서 자유로운, 오로지 어떤 높은 익명의 차원만을 의식한 채 구현되어야 한다. 대상의 재현이나 감각적 기교에 관련된 집착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각각의 경계와 윤곽은 크게 완화되고 뒤로 물려, 더 유동하고 관계적이며 생동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싱싱하고 아름다운 꽃만큼이나 꾸미지 않고 늘어진 식물도 동일하게 지혜요, 치유며 기도다. 그 모든 것이 허 보리가 즐기는 채집의 대상이다. 그 깊은 곳에 시선을 준다. 마음이 열리고 새로운 공간이 열린다. 일상이 뒤로 물러나고 오감이 깨어난다. 꽃을 그릴 때, 허 보리 회화 미학의 궁극적 지향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

[1] 에릭 스프링티드, 『시몬느 베이유』, 권은정 옮김 분도출판사, 2008, p.114.

[2] 아베 고보, 『모래의 여자』, 김난주 옮김, 민음사, 2001, p.10

2023.10

Simultaneously Painting Flowers and The Wind, In A Pacifying Mood

 

 

Shim Sang-yong (Director of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of Art)

 

 

“To see is to love.”

 

Simone Weil-[1]

 

 

 

  Pacifying Mood

 

   Hur Boree had previously created soft weapons by sewing together garments - tanks with limp barrels, fluffy grenades, and other sophisticated weapons of mass destruction and absurd weapon systems that defied practicality. As always, Hur Boree urges us to eschew metadiscourse, such as modern ideology or critiques of imperialist civilization. To the astonishment of the viewers who have grown accustomed to complex and profound interpretations, this is how Hur describes her paintings. “People who lead their lives with fierce determination, passion, burnout, and fatigue... Eating and sleeping, earning and spending... Repetitive actions like cleaning a house that will soon be cluttered again, wearing fresh clothes and washing them, eating a meal only to feel hungry again.”

   This has always been Hur Boree's world. It stands apart from fervent narratives, heroism, ideologies, mythologies, exaggerated emotions, or intellectual grandeur. Hur begins with the humble repetition of daily routines, finding significance within seemingly mundane chores, such as gathering her husband’s ties and the family’s laundry. She always views the square canvas as a metaphor for her family’s square apartment.

   At what point does life become meaningful? Henri Nauen suggests that it is when we remain faithful to the small, repetitive tasks that may seem devoid of meaning or utility, much like the changing of seasons. “New dimensions open up within life, embarking us on a long journey of introspection.” This is linked to the inner workings of Hur Boree’s painting.

   Hur Boree’s painting, in many ways, resembles the act of collecting. She draws inspiration from Kōbō Abe’s novel The Woman in the Dunes. Kōbō depicts collecting as a source of simple and immediate joy, like discovering a new species. In this context, Hur Boree’s collections are not too different. The difference is that the objects in her collections are not insects but small fragments of mirrors that serve as reminders of life’s meaning.

   In the novel, Kōbō mentions a missing protagonist who has a hobby of collecting insects. “Maintaining an obsession with collecting insects even into adulthood is a sign of mental deficiency.”[2] The novel discusses the correlation between collecting insects and more severe signs of mental deficiency. Likewise, painting is inherently tied to a profound awareness of one’s own inadequacies. For Hur Boree, collecting is internally connected to the imagination of escape and liberation. She is a collector who fishes for imagination, and the fishing grounds are her daily life. So, what does her daily life look like? Her days revolve around her apartment and workshop, which serves as “a well of escape.” In a space where she grapples with fatigue, low spirits, and a desire to escape, she fishes for imagination for the day. She embarks on another long journey of introspection that creates a fresh space for life.

 

 

  Flowers are a sacrament!

 

   Hur Boree continues to paint more flowers, which is akin to painting more people. That is because of the striking resemblance between flowers and humans. For both flowers and humans, living life entails hard work. A flower’s life is no less demanding. It eagerly absorbs water, follows the sun, and endures the rain and wind. Both flowers and humans are transient beings. When the cold wind blows, it accepts that the time has come to let go. Because flowers bloom and eventually fade, they are all the more worthy of love. In the same way, humans also stumble in the moments of life and succumb to the passage of time.

   Hur Boree is stunned by the unwavering goodness of flowers and grass. Meanwhile, we tend to be stunned by darkness. Our hearts sink watching the daily news on television. We are shocked by plagues, wars, killings, murder, misery, vulgarity, horror, and the frightening surge of darkness. But what truly deserves our astonishment are the flowers that still bloom amidst this adversity. This is the source of inspiration that Hur Boree finds in flowers and grass - a sacredness that endures throughout eternity.

   To Hur Boree, flowers and plants are not objects that must be defined but rather a call that defines who we are. Hur’s small paintings of flowers are not still lifes. Hur’s larger works of flowers are not conventional landscape paintings. A flower is not an inanimate object to be observed (it), but a living entity that deserves to be loved (you) and, ultimately, a sacrament that provides self-reflection. A sanctuary you must throw yourself into. Consider the 53x45cm painting Diving.

 

   *Redefining aesthetics: Flowers preserve the original form of things that deserve to be loved. Aesthetics should be a study that revolves around the contemplation and discovery of this archetype. Expression should be a high form of mental act that discovers and reveals the possibilities inherent in people and things. It should be a sacrament, a form of worship. In this respect, the endeavors of Western modern aesthetics were largely hollow.

 

   *Rereading art history: Only when we confront this goodness of the flower can we truly assess the missteps made in the symbolic aesthetics of the previous century. This includes the ignorant doctrines of modernism, which called for the banishment of the object, and the Platonic dichotomy that sought to exile flowers and grass from the realm of art. As painting was detached from the objective world, the senses were dulled, and the vigor of thought waned significantly. Painting flowers does not merely signify a preference for the figurative over the abstract. Flowers perpetually evoke humility and introspection. Within them is a reflection on aesthetics that eliminates plants, irrational aesthetics, and overgrown discourses that begin with the prefix “post.” Just the thought of coined words like “post flower” makes me chuckle in disbelief.

 

 

 

  Simultaneously painting flowers and the wind

 

   Hur Boree simultaneously paints flowers and the wind. You cannot draw a live flower like a flower in a vase. Unless you are drawing an artificial flower that is detached from the world, you must acknowledge the sunlight upon the petals and the breeze blowing in the field. You must not separate the flower from the wind that shakes its stem. You must capture the breath of the flower and the whisper of the grass and express them in unison. This painting characteristic should be more prominent when painting a large field covered with buckwheat flowers, such as in Buckwheat Abstract. Hur Boree’s painting of the field of buckwheat flowers can evoke a sense of maternal love in its observers. This is because to see is to love. It is a painting technique that is a response to love.

   Painting is a refuge for the cluttered mind, a brief escape from life’s burdens. It must be executed with a consciousness rooted in a higher, nameless dimension, free from the compulsion to describe, narrate, explain, or prove to be achieved. Neither an obsession with object replication nor sensory finesse is helpful. Instead, each boundary and contour should be relaxed and set back, becoming more fluid, interconnected, and alive.

   An unadorned, drooping plant offers as much wisdom, healing power, and prayer as a fresh, beautiful flower. These are all the subjects of Hur Boree’s collection. Hur peers into their depths. The heart opens, and new dimensions open. Everyday life recedes, and the five senses awaken. When painting flowers, the ultimate goal of Hur Boree’s painting aesthetic becomes more apparent.

------------------------------------------------------------------------------------------------------------------

[1]Eric O. Springsted. Simone Weil. Translated by Kwon Eun-jeong. Benedict Publishing Company, 2008, p.114

[2]Kōbō Abe. The Woman in the Dunes. Translated by Kim Nan-ju. Minumsa Publishing, 2001, p.10

2022.4

@이화익갤러리_화론

  서로 부대끼면서도 침범하지 않고 주어진 자신의 자리에서 씩씩하게 자라나는 식물들을 보며 허보리는 부침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거침없이 화면을 가득 채운 꽃과 봉오리, 잎사귀, 그리고 줄기가 한데 뒤섞인 모습이 얼핏 보면 전면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상과 분리되지 않은 공간, 무아지경의 상태로 나아간 듯한 화면은 일종의 카오스에 가깝다. 허보리는 이번 작업 <January Abstract> 시리즈에서 제주의 겨울 바람을 오롯이 견딘 꽃과 풀들을 담았다. 비록 봄의 꽃만큼 화려한 빛깔은 아닐지라도 오히려 색이 바랜 꽃잎과 시든 잎사귀, 앙상한 가지에는 더 생생하고 강인한 생명력이 농축되어 있다. 그 에너지를 바탕으로 그들은 또 남은 계절을 살아낼 것이다. 작가가 이 꽃과 풀들에게서 얻은 교훈이다.

화론: 꽃(花)을 말하고, 그림(畵)을 말하다 

이민수 (미술사, 문학박사)에서 발췌

 

2021.10

허보리- 삶을 살아내는 식물들의 눈부심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1. 허보리가 제주도에서 보내온 최근 그림은 다양한 식물의 형상들이 자유분방하고 활기차게 포착되어있다. 전적으로 그것 자체만이 화면에 등장하며 모든 것들은 생생하고 바글바글하다. 그 생동감을 빠른 필력과 신선한 색채로 잡아채고 있다는 느낌이다. 흡사 사군자를 쳐낸 동양화의 한 자취를 엿보는 듯도 하다. 제주에서 서식하고 있는 식물들은 어쩐지 도시나 내륙의 것과는 조금 다른, 뭐라고 할까 보다 더 씩씩하고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들 같기도 하다. 드센 바람을 맞고 그만큼 거칠고 황량한 자연 조건 속에서 태어나 생을 이어온 것들이라서인지 하여간 질기고 억세 보이는 자태와 함께 그런 환경에 맞게 제 몸을 탄력적으로 맞추어나가 애써 가꾸어온 생의 이력들이, 이른바 눈물 겹고 곡절이 많은 무엇인가가 그네들 모습 어딘가에서 어른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하긴 제주도에 있는 식물뿐만 아니라 온갖 곳에서 자기 목숨을 이어가는 모든 생명체들은 죄다 그 나름의 삶을 이어가려는 간절함과 고군분투의 사연이 없을 수 없다. 생명 있는 것들은 험난한 환경 아래서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는 욕망과 공포, 희망과 불안, 생존과 죽음 사이에서 끝없이 부침하는, 그러니까 매 순간 긴장감 어린 모종의 선택을 강요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이런 순환의 고리에서, 압박의 틀에서 자유로운 생명체는 없다.

그간 허보리의 작업은 대부분 그런 맥락에서 이 힘겨운 생존의 사회적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개별 존재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이나 인상적인 이야기들이었다고 기억된다.‘사람들이 현실을 살아내는 이야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이었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그림들은 대부분 이야기를 지니고 있고 그래서 문장을 거느리는 이미지들이었다. 이른바 문학적이며 은유와 상징을 지닌 그림들이다. 현실의 삶에서 자연스레 길어 올린 여러 감정과 생각의 파편들을 하나의 장면으로 힘 있게 만드는 능력이 두드러진 편이었다. 도상적이며 다분히 일러스트레이션이나 삽화와도 같은 ‘결정적인 한 컷’을 닮았다는 기억이다.

 

2.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제주도에서 살게 되면서부터 작가는 그곳에서 서식하는 다양한 식물들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근작은 그 결과물이다. 일상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제주도의 식물을 관찰하고 그로인해 번져나간 여러 상념을 다양한 꽃과 풀의 형상을 빌어 그려냈다. 작가는 들에 가득 핀 꽃과 우거진 나뭇가지, 어떠한 규칙도 없이 자유롭게 자라나는 수풀더미, 병에 꽂힌 꽃 등을 그렸는데 이는 꽃과 풀의 재현이라기보다는 그것들의 생존력, 생명력, 살아가는 생생한 모습 같은 것을 암시하는 이미지이자 이를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활달하고 편안한 그리기를 구현하는 매개로 풀어내고 있다는 인상이다.

우선 자신의 삶의 주변 영역에서. 동선에서 이루어진 이상한 발견이자 새로운 만남인 이 식물들과의 조우는 새삼 식물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작가는 식물을 새롭게 다시 보기도 했지만 그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우리 사회나 현실의 모습을 또한 들여다보기도 했다.

“식물이란 한 없이 연약하기도, 한없이 끈질기기도 한 존재 같다...어떻게든 살아내는 인간의 모습 같다...식물들이 멈추어 있지 않고 피고 지고 하는 순간들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다. 짧고도 긴 인생...”(작가노트) 그러니까 작가는 “식물들이 와글와글 자라나는 모습이 마치 사람들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여겼고 그래서 인간과 식물의 닮은 점을 발견한다. “빼곡히 피어있는 땅 위의 꽃들, 극한의 상황에도 씩씩함을 잃지 않는 식물이 초상을 그리는 일은 내게 마치 한 인물의 인생을 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작가노트)

 

3. 작가는 산책길에서 자유롭게, 아무렇게나 피어난 풀과 꽃들을 본 후 이를 사진으로 담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그림으로 옮겨 그린다. 하찮다고 여겼거나 간과하거나 지나치고 만 식물의 존재는 이제 그림을 통해 그 나름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빛나는 존재로 환생한다. 작가는 산책길에서의 그 만남의 순간을 기록해두고, 기억해두고 이를 다시 그림으로 그렸다. 해당 식물의 색감과 식물이 갖고 있는 선의 자유로움을 비교적 속도감 있는 필치로 표현하고자 했다. 순간 보았던 그 모습에 대한 기억을 충분히 “착즙하듯 집중하여” 끌어내고자 한 작가는 무엇보다도 감정적으로 대상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빠른 필치로 죽죽 그어나간 선들은 전적으로 식물의 생장력을 따르고 있으며 그 호흡과 생명력/기운을, 그들의 활력을 기죽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용기와 힘을 표현하는데 바쳐지고 있다. 이는 마치 동양화의 선묘, 필선의 기세를 연상시킨다. 화면 전체에 가득 파고든 풀과 꽃은 제 얼굴, 몸을 격렬하게 흔들어댄다.

동양의 자연관은 살아 움직이는 자연을 동사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이른바‘생성론적 자연관’이다. 생성론의 관점은 유에서 무를 보고 무에서 유를 보는 일이다. 우리의 감각세계가 유에 사로잡혀 있으면 생성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생성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개별적 형상 속에 요동하고 있는 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보고 있는 자연은 맹렬하게 사라지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소멸되는, 순환하는 자연을 어떻게 형상화시킬 수 있을까 이다. 그래서 산수화에서의 선은 단순히 형태의 윤곽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운의 세, 흐름, 리듬을 암시한다. 자연이 가진 무궁한 생성의 힘과 리듬을 재현하고자 하는 선이다. 허보리의 근작이 보여주는 선 역시 그러한 선의 활용에 가까이 붙어있다는 인상이다. 자연을 무궁한 변화과정으로 보고 일체 변화를 긍정하여 그 변화와 함께 하는 선이자 생명체가 지닌 활력과 악착스러운 생의 고군분투를 추적하는 선이다. 그와 함께 이전의 작업이 내용/서사에 의한 도상화가 중심적이었다면 근작은 그러한 내용의 일관성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붓질과 색채 등이 보다 우선되면서 회화의 맛을 좀 더 자유롭고 관능적으로 즐기려는 욕망이 더 커 보인다.

 

작가는 자기 눈으로 제주도의 이곳저곳에, 마구 자라나고 번져나는 다양한 식물을 보고 그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여기서 그는 비로소 주체가 된다. 작가란 스스로 보는 자이고 사물이나 세계에 부여된 관념이나 상식을 따르는 이가 아니라 그것을 물리친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보려고 노력하는 이다. 익숙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어느 순간 낯설게 다가옴을 느끼는 순간 그것들은 이상한 힘, 빛을 발산한다. 허보리 또한 어느 날 우연히, 비근하고 소박하지만 더없이 강렬하고 악착스레 제 주어진 삶을 찬란하게 이어가는 저 식물이란 존재의 낯설음과 눈부심을 보았다. 그래서 그것을 그림으로, 식물의 삶과 모습을 그대로 닮은 그런 그림으로 그리고자 했다. 식물이자 인간이고 삶이자 죽음이 무성히 포개진 풍경이다.

Oct. 2021

Hur Boree – The Dazzling Sight of Plants Living Their Lives

 

Park Young-taek (Professor, Kyonggi University, Art Critic)

 

 

1. The most recent work of Hur Boree from Jeju Island portrays various free and lively plants. They are the only subjects that appear in the work, and everything is vivid and energetic. It feels that the liveliness of the plants is captured with the quick brush strokes and fresh use of color, and reminds one about an aspect of Oriental painting of the Four Gracious Plants. The plants living in Jeju Island seem to be, how should I say it, stronger and more gallant than those of the city or the inland. They were born and lived their entire lives with the strong wind under harsh and desolate environmental conditions. This may be the reason why they seem tougher and stronger, as they made continuous efforts throughout their lives to adapt to such an environment. This all results in some sort of touching and hints of their lives full of stories that come from looking at them. In fact, this is not only for the plants in Jeju Island. All things that strive to live from all over the world have some sort of desperateness and strive to survive. All living things live under harsh environments with the desire and fear to stay alive, swinging back and forth from hope and anxiety, and survival and death. They are required to make anxious choices every minute. No living thing is free from such a cycle, or the pressure to choose.

In this aspect, when I think of Hur Boree’s works, they come to me as personal thoughts or interesting stories of individual beings that live amidst this difficult social structure of survival. Hur portrays in her artwork her perception of the “story of people living their individual lives.” This is why most of her paintings have a story, and call upon sentences. That is, her paintings are literary, with metaphors and symbols. She has the great skill of making fragments of emotions and thoughts naturally obtained from real life to come together as a single powerful image. Her works are remembered as iconic, similar to “that one scene” like an illustration.

 

2. Ever since Hur moved to Jeju Island for personal reasons, she started to focus on the different plants of the island. Her latest works are a result of such observations. She has observed the plants of Jeju Island that she came across by coincidence, and portrayed the various thoughts and ideas she developed in the form of various plants and flowers. Her works include flowers that spread out all across a field, dense tree branches, piles of bushes that grew freely without any rules, and flowers in vases. They are not simply representations of flowers and plants. Rather, they are images that suggest their viability, vitality, and liveliness. She uses the flowers and plants as a medium to create the most fundamental, vivacious, and comfortable drawings.

Above all, it may be that the unusual and new encounter with these plants in her everyday life and surroundings have caused her to actually feel the existence of plants. These plants provided the artist the opportunity to take a new perspective on them, as well as a new perspective on human beings, society, and reality.

“Plants may be weak, but also strong...They’re like humans, who live by any means...I wanted to record the moments of plants, as they bloom or wither, instead of remaining static. They are exactly like humans. A short, but long life...” (Artist’s note) That is, she felt the “swarms of plants are similar to humans” and identified how plants and humans are alike. “As someone who draws portraits, drawing flowers that filled up the land, and plants that remain valiant despite the extreme conditions felt like drawing the life of a single individual.” (Artist’s note)

 

3. When she comes across freely-standing plants and flowers during a walk, she takes a photograph of them, then paints based on the memories she had with the photograph. Plants, that were considered trivial or that were simply passed by, are reborn as splendid beings with their own expressions and movement. Hur records the moment of her encounter with the plants, remembers them, and then paints them again. She aimed to express the colors, the freedom of the lines of the plants, with relatively quick strokes. According to Hur, it is most important to immerse oneself in the object emotionally, as she tries to bring out the memory “with great focus, as if the memory is being extracted from the mind.” Lines that are drawn boldly in rapid strokes fully comply with the vigor of the plants, and are used to express their breaths, vitality and energy, liveliness, and their courage and power to live to the best of their abilities without being daunted. They remind one of a line drawing or strokes from an Oriental painting. Plants and flowers that fill up the entire canvas are swinging their faces and bodies back and forth intensely.

The Asian view of nature is one that focuses on “the generative theory of nature,” that is, aiming to identify the dynamics of the living and moving nature. The generative perspective involves seeing nothing from something, and something from nothing. If our entire senses are focused on “something,” we cannot see the generative growth. To identify such growth, we have to focus on the “nothing” that is always quaking within individual figures. In fact, the nature as we see it is ferociously disappearing. The conundrum is how to represent the disappearing and circulating nature. Lines in landscapes do not simply represent the figures of the form, but allude to the energy, flow, and rhythm of the object. The lines represent the infinite power and rhythm of nature. The lines in Hur’s recent works seem to be very close to these lines. They consider nature as something that changes infinitely, accept such changes, and stand by such changes. At the same time, they represent the vitality of the living things, and convey the unsupported fights within the perseverance of life. Furthermore, whereas her past works mostly comprised iconographies created from stories and narrations, although her recent works still have such traits, they are more focused on the strokes and colors as if portraying Hur’s desires to freely and sensually enjoy the essence of the paintings.

 

Hur looks at the various plants that are spread indiscriminately around places of Jeju Island with her own eyes, and aims to tell their stories. This is how she finally becomes the main agent. An artist should have the ability to see for himself or herself, rather than complying to the norms and conventions granted to an object or the world. An artist should throw out such norms and conventions to see something more. When familiar and ordinary things suddenly appear as unfamiliar, they exert unusual power and light. Hur Boree happened to come across the unfamiliarity and dazzling sight of the common and simple plants, which are continuing to live their lives with tenacity and strength, by chance. She decided to portray the plants in her paintings, expressing the lives and the images of the plants as they stand. The plants are like humans, filled with life and death.

2021.3

@통인화랑_화론

정신영 미술평론가

 

오랜 미술의 역사를 생각할 때, 익숙한 회화장르에서 익숙함을 앗아가는 능력은 값진 재능이다. 아무리 포스트모던이다, 미술사에 새로운 것은 더 이상 없다, 자 포자기한 듯 말해도 과거의 답습이나 심화만으로는 (대중의 사랑은 받을 수 있을 지 몰라도) 비평적으로 두각을 드러내는 작품이기는 힘들다. 허보리의 꽃그림들은 꽃을 주제로 삼고는 있지만 ‘꽃그림’이라 부르기에는 진화된 새로운 지점을 찾아 나선다. ‘능래역1’(2020)과 ‘능래역2’(2020) 모두 지역명이 제목이지만 화면은 ‘흐드 러지게’라고 표현하는 것을 기다리는 듯한 꽃과 이파리들로 꽉 채워져 있다. 작가 의 붓질은 그러나 이들이 꽃-다움이나 줄기-스러움을 애써 인식하지 않는 것처럼 무심하거나 무던하다. 무엇보다 붓놀림의 속도감때문에 꽃그림 특유의 매만지는 듯한 애착이 배제되어 있어 상쾌하다. 굳이 꽃의 생물학적 조건이나 또는 인문학 적 상징, 그로 인한 감상적 영역에 접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홀가분하면서, 내 감정의 자유를 허락하는 의미의 공백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회화적으로는 원근 이 억제되고 공간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색감 위주의 패턴이나 추상화과정 으로 단순화 될법도 한데, 화면을 종횡무진하게 달리고 뻗고 호흡하는 에너지의 기세 때문에 결국 ‘흐드러지게’ 핀 꽃그림임이 드러난다. 새롭게 발견된 꽃그림이 반갑다.

2019.2

광화문 사냥꾼과 고기 미학

 

글: 석혜원(독립큐레이터)

 

하나같이 비슷한 양복차림의 수많은 직장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출근길의 광화문의 일상적인 풍경을 보며 허보리작가는 가족 부양을 위해 사슴사냥을 나가던 원시부족사회의 ‘사냥꾼’을 떠올린다. 아이를 안고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할 때엔 본인의 모습이 사냥을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는 간난아이에게 젖을 주는 과거 움집의 여인과 다르지 않다 느끼고, 식구(食口)들을 위해 부위별로 포장된 붉은 살코기들을 고르며 사냥꾼이 획득한 전리품을 상상한다.

이렇게 허보리작가의 작업은 유독 주변에 대한 관찰과 삶을 향한 따뜻한 시선에서 출발한다.

 

과거 무장가장시리즈에서 작가는 승자독식,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 속에서 가족 부양을 위해 일하는 가장들의 모습을 힘없는 무기로 표현한바 있다. 이전 작업들이 ‘무장가장-사냥꾼‘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전시는 사냥꾼이 획득한 ’전리품‘에 주목한다.

이 시대의 가장들은 진짜 피를 흘리지는 않지만 매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전쟁터에서보다 더 치열하게 싸워 전리품인 ‘월급’을 얻는다. 작가는 현대사회의 전리품을 기념비로 만들어 사냥꾼들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며 경의를 표한다.

 

이번 전시 <광화문 사냥꾼>에서 선보이는 10점의 작품은 고기의 부위별 마블링을 수놓은 위풍당당한 고기추상이다. 언젠가는 굉장히 훌륭했던 무기였던 광화문 사냥꾼들의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뜯고 자르고 이어붙인 바탕 위에 반복적인 바느질이란 노동집약적 행위를 통해 전리품을 기념비로 만들었다. 면사 여섯가닥이 꼬여있는 자수실을 한가닥씩 뽑아 마치 소묘를 하듯 수놓은 채끝살, 살치살, 등심, 안심, 양지머리의 각기 다른 마블링은 와이셔츠와 넥타이 위의 추상화가 된다.

 

허보리작가는 가장 아름다운 패턴을 찾기 위해 그녀의 심미안으로 참 많은 고기들을 수 없이 들여다보고 가장 예쁜 마블링을 가진 고기를 발견한다. 넥타이와 셔츠를 고르고 해체하고 꿰매는 행위, 전리품의 아름다운 패턴을 수실로 한땀한땀 수놓는 수없이 반복적인 행위와 시간이 모여 화려한 작품이 완성된다.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은 옷을 해입고 이불을 꿰매던 과거의 여성들의 손바느질과 오롯이 닮아있다.

 

그녀는 바느질과 전통 자수를 작업의 방식으로 택함으로써 매일의 반복적 노동을 적층시킨다. 얇은 수실이 반복적으로 수놓아져 만들어지는 고기의 마블링은 현대인들의 매일의 노동이자 수고로운 시간의 기록인 것만 같다. 입체적이면서도 다분히 회화적인 허보리의 고기추상은 발탁 받은 임금노동자-광화문 사냥꾼들의 수고에 찬사를 보내는 동시에 남녀 간의 전통적 역할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현대사회에서조차 여전히 전통적인 여성성을 강요받는 여성들의 그림자 노동을 동시에 조명한다.

2016. 9

@스페이스몸_거울아 거울아 

허보리의 ‘풍자-거울’

류병학 미술평론가

“매일아침 생계를 위해 일을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원시시대에 인간이 죽지 않고 살아 남기위해 도구를 들고 고기를 사냥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사회에서의 통용되는 돈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사냥감이나 다름없는 것은 아닐까. 또한 고기를 먹을 때의 인간의 탐욕스러운 인상 혹은 더 나아가 육식동물이 가지는 어떤 잔인함과 게걸스러움 같은 것들이 이 사회 안에서 보이는 크고 작은 비인격적인 행태와 감정들. 배신, 살인, 증오와 같은 모습으로 연상되었다. 육식 동물 같은 포악함은 숨긴 채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정숙한 정장을 입고 거짓 웃음으로 한 번 더 포장하여 어떤 다른 형태의 수렵과 사냥의 행동들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 허보리의 작업노트 중에서

허보리는 스페이스몸미술관 3전시장에 3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클래식 수류탄>과 <채끝살 니들 드로잉> 그리고 <4인 삽탁>이 그것이다. <클래식 수류탄>은 천으로 제작한 ‘부드러운 수류탄’ 작품이고, <채끝살 니들 드로잉>은 마치 종이에 드로잉 하듯이 천에 수를 놓은 작품이고, <4인 삽탁>은 나무판과 4개의 삽들로 제작된 ‘식탁’이다. 우선 스페이스몸미술관 1전시장에서 보았던 허보리의 <부드러운 M4>처럼 천으로 제작된 일명 ‘부드러운 수류탄’을 보자.

허보리의 <클래식 수류탄>은 백색의 좌대 위에 천으로 만든 수류탄을 설치해 놓은 작품이다. 일단 백색의 좌대부터 보자. 그것은 마치 위대한 영웅들을 조각한 기념비상을 우러러보도록 만들었던 좌대처럼 보인다. 물론 작가는 장인의 손을 빌려 그 백색의 좌대를 제작했다. 그리고 그 좌대 위에 진열된 수류탄을 마치 고귀한 유물을 진열해 놓는 것처럼 투명한 유리 케이스로 보호해 놓았다. 따라서 누군가 ‘부드러운 수류탄’을 훔치기 위해 유리 케이스를 만지면 곧 경보음이 울릴 것처럼 느껴진다.

황금액자에 끼워진 <부드러운 정물>과 백색의 받침대 위에 진열된 <클래식 수류탄>은 어느 순간 사라진 현실세계와 가상(회화)세계 사이의 경계인 회화의 ‘액자(Frame)’와 전통적 조각의 지지체인 '받침대(pedestal)'를 다시 재고하게 한다.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칸트(Immanuel Kant)의 ‘자기비판’ 논리를 회화에 적용하여 ‘회화의 자율성’을 주장했다. 그의 ‘모더니스트 회화(Modernist painting)’는 ‘회화의 평면성(flatness of painting)’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그린버그가 규정하는 모더니즘 회화의 평면성은 앙드레(Carl Andre)가 ‘회화의 길’이라고 말한 스텔라(Frank Stella)의 일명 ‘띠 그림(Stripe Painting)’에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회회를 회화로 가능하게 했던 ‘틀’인 액자는 사라지고 결국 회화는 벽면에서 돌출하여 저드(Donald Judd)의 ‘특별한 오브제(specific object)’로 전환되었다.

부엌용 의자 위에 자전거 바퀴를 접목시킨 뒤샹(Marcel Duchamp)의 <자전거 바퀴(Roue de bicyclette)>는 전통적인 조각에서 볼 수 있는 이원구조, 즉 조각(작품)/받침대라는 이분법을 해체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ready-made) 이후 전통적인 조각은 가상세계의 받침대로부터 해방되어 현실세계의 ‘땅’을 지지대로 삼게 되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조각으로, 앙드레의 일명 ‘철판 조각’처럼 관객이 발로 밟을 수 있는 조각으로, 급기야는 관객을 조각 안으로 끌어 들이는 조각으로 변화되었다.

데리다(Jacques Derrida)는 <파르에르곤(Parergon)>이라는 텍스트에서 칸트의 <판단력 비판(Critique of Judgement)>에서 회화의 액자와 조각의 받침대를 뜻하는 ‘파르에르가(Parerga)’에 주목한다. 그는 예술에 관한 철학적 담론들이 회화의 액자나 조각의 받침대를 작품(Ergon)에 기생하는 ‘부차적인 것(parergon)’으로 간주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그 부차적인 것이 작품을 보호하기 위한 작품에 유용한 것이면서 동시에 작품에 위협을 가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회화의 ‘액자’나 조각의 ‘받침대’는 작품의 밖(hors d'oeuvre)에 있으면서 동시에 작품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회화의 진리(La v rit en peinture)>에서 플라톤(Platon)으로부터 칸트,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 훗설(Edmund Husserl) 그리고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로 이어지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예술의 철학적 언술이 예술작품의 안과 밖 사이의 경계에 관한 하나의 담론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예술에 관한 위대한 철학적 담론은 안/밖을 대립시켜 밖을 배제한 안의 규정으로 규결되었다고 데리다는 지적한다. 때문에 그러한 철학적 담론은 항상 파르에르곤에 반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파르에르곤을 통해 에르곤 중심의 예술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해체시킨다.

허보리는 어느 순간 사라진 회화의 ‘액자’와 조각의 ‘받침대’를 부활시킨다. 그런데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액자와 받침대는 허보리의 작품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작품의 요소로 출현한다는 점이다. 만약 <부드러운 정물>에서 ‘황금액자’가 부재한다면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듯이 ‘앙꼬 없는 찐빵’이 될 것이고, 마찬가지로 <클래식 수류탄>에서 백색의 좌대를 없앤다면 ‘사랑 없는 동거’가 될 것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액자나 받침대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작품에서 액자나 받침대는 ‘정물화’나 ‘부드러운 수류탄’처럼 작품을 구성하는 ‘약방의 감초’ 같은 요소이다.

자, 이번에는 백색의 진열장 안에 보관해 놓은 천으로 만든 ‘부드러운 수류탄’을 보자. 당신이 그 ‘부드러운 수류탄’으로 한 발짝 다가가서 본다면, 그것이 졸라 비싼 실크 넥타이를 해체시켜 바느질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렇다! 허보리의 <부드러운 M4>가 그녀의 남편이 착용했던 정장 한 벌을 통째로 사용하여 ‘부드러운 소총’으로 변형시킨 것처럼, <클래식 수류탄>은 그녀의 남편이 사용하던 실크 넥타이를 사용하여 ‘부드러운 수류탄’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와이? 왜 그녀는 남편의 정장과 넥타이까지 ‘무기’들로 변형시킨 것일까? 남편의 의상과 무기 사이에 어떤 문맥이라도 있단 말인가? 허보리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살상을 하는 무기의 모양으로 돈을 벌기위해 필요한 전투정신을 말하되. 어떠한 상처도 줄 수 없는 무기력한 무기들의 질감으로 그 아이러니함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연민하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혹은 '우리 이제는 좀 다를 수 없을까' 라는 애통한 마음을 섞어서 많이 부드럽고 폭신하고 뚱뚱하게 만든다. 바지의 칼주름은 곡선을 그리며 늘어진 대포로, 정갈한 실크넥타이는 껴안기 좋은 크기의 보드라운 권총으로. 칼은 완전히 방전되어 축 쳐진 퇴근길의 직장인처럼 온전히 서있지도 못하게 그렇게. 더 격렬하게 쓸모가 없는 무기들이다.”

허보리는 아침마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직장으로 나서는 남편을 보고 마치 전쟁터로 나서는 것 같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에게 양복과 넥타이는 옛 군사들이 싸움터에 나설 때 입는 ‘갑옷’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의 양복과 넥타이로 ‘부드러운 무기’들을 만든다. 물론 그녀는 무기들을 제작하기 위해 용산 전쟁기념관을 드나들고, 인터넷에 나오는 무기 사이트와 전문 블로그, 밀리터리 매니아들의 쇼핑 사이트도 서핑하고, 실물 사이즈 무기 프라모델들을 구입하여 조립하면서 무기의 구조를 연구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허보리의 ‘무장가장(武裝家長)’이다.

스페이스몸미술관 3전시장에는 방이 하나 있다. 그 방 안에는 네 개의 다리들을 삽들로 제작한 탁자와 벽면에 마치 ‘가훈(家訓)’처럼 보이는 그림이 설치되어 있다. 신작 <채끝살 니들 드로잉>과 <4인 삽탁>이 그것이다. 우선 <채끝살 니들 드로잉>을 보도록 하겠다. 그것은 마치 ‘붉은 단색화’처럼 보인다. 그런데 필자가 그 ‘붉은 단색화’로 한 걸음 다가가니 그것은 고기 덩어리 하나가 유리 액자 안에 넣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허보리의 <채끝살 바느질 드로잉>은 최근 국내 미술시장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단색화’에 대한 조롱, 즉 ‘한물간’ 단색화에 대한 일종의 ‘똥침’이란 말인가?

필자의 키보다 높은 곳에 설치된 고기 덩어리가 들어있는 액자는 다행이도 보기 편하도록 필자의 시선으로 기울어져 있다. 붉은 그 고기 덩어리는 언 듯 보기에 먹음직스런 등심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리 액자에 넣어진 그 등심은 하나도 변색되지 않고 싱싱해 보인다. 당 필자, 궁금한 나머지 그 고기 덩어리로 한 걸음 더 다가가 본다. 오잉? 붉은 고기 부위는 붉은색 실크 넥타이들로 바느질한 것이고, 대리석 무늬의 지방들은 와이셔츠로 수를 놓은 것이 아닌가. 그 가짜 등심을 허보리는 <채끝살 바느질 드로잉>으로 명명했다.

채끝살은 등심에서 이어지는 허리 부분의 고기로 안심 위의 부분을 뜻한다. 채끝살은 육질이 연하고 향기가 좋고, 특히 풍미가 좋아 스테이크나 생고기 구이, 샤브샤브 등에 이용된다. 두말할 것도 없이 맛도 좋다. 그러나 허보리가 붉은색 실크 넥타이들을 해체시켜 바느질한 ‘채끝살’은 일종의 ‘그림의 떡’이다. 그런데 허보리의 ‘부드러운 무기’와 ‘부드러운 고기’ 사이에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허보리의 진술을 들어보자.

“흘러가는 삶속에서 나와 내 주변인물들이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것을 본다. 그가 처한 상황이나 감정에 따라서 인간은 은유적으로 다른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음식이나 일상적인 사물들이 갖고 있는 조형적인 특징과 기능에 사람의 감정을 빗대어 그 사람을 대신하는 상태로 만든다.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장면, 그러나 감정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오히려 사진이나 극사실의 회화보다 더 구체화된 상황을 연출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허보리의 거울에 비친 붉은 고기 덩어리가 인간의 본래 모습이란 말인가? 문득 ‘고기’를 사냥하던 원시인이 떠오른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 역시 ‘고기’를 얻기 위해 일터로 나간다는 점에서 원시인의 사냥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그녀는 ‘지금 이 사회에서의 통용되는 돈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사냥감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덧붙여 그녀는 ‘고기를 먹을 때의 인간의 탐욕스러운 인상’에서 ‘육식동물이 가지는 어떤 잔인함과 게걸스러움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서 그것이 ‘이 사회 안에서 보이는 크고 작은 비인격적인 행태와 감정들’, 즉 ‘배신, 살인, 증오와 같은 모습으로 연상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허보리에게 더 가증스럽게 보인 것은, 우리가 ‘육식 동물 같은 포악함은 숨긴 채’ 우리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정숙한 정장을 입고 거짓 웃음으로 한 번 더 포장하여 어떤 다른 형태의 수렵과 사냥의 행동들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허보리는 붉은 실크 넥타이들을 해체시켜 바느질하여 제작한 붉은 고기 덩어리를 넣은 액자를 방의 벽면에 마치 가훈처럼 걸어놓았다. 머시라? 전쟁(직장)에서 얻은 ‘전리품(戰利品)’이 조상 대대로 그 집안의 자손들에게 도덕적인 실천 기준으로 가르치는 교훈이라고...요?

자, 마지막으로 허보리의 <4인 삽탁>을 보자. 그것은 일반 가정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4인 가족이 사용하는 4인 식탁과 닮았다. 물론 식탁의 크기나 높이 등을 본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 식탁의 다리들은 모두 삽으로 교체되어 있다. 더욱이 그 ‘삽탁’은 삽의 뾰족한 부분이 바닥에 맞닿아 있어 아슬아슬해 보인다. 만약 누군가 그 ‘삽탁’을 살짝 만지기라도 한다면 곧 무너질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그 삽탁을 방 한복판에 아무런 경고판도 없이 버젓이 설치해 놓았다.

당 필자, 안전이 걱정되어 몸을 숙여 삽탁의 밑 부분을 살펴보았다. 오잉? 삽이 탁자의 나무판 안에 끼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허보리는 장인 목수의 도움을 받아 식탁의 높이만큼 삽의 손잡이 부분을 잘라내고, 두께가 있는 나무판에 삽의 손잡이 부분을 끼울 수 있도록 파내었다고 한다. 그리고 손잡이 부분을 잘라낸 삽을 나무판의 홈에 끼워 완성시킨 것이다. 그런데 허보리의 <4인 삽탁>은 <채끝살 바느질 드로잉>과 어떤 관계가 있는/없는 것일까? 그 점에 관해 허보리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이 사회의 최소단위인 가정이 굴러가기 위해 부지런히 돈을 버는 가장(家長)들이 있다. 그것이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그들은 이 사회와 문화가 그들에게 떠맡긴 알 수 없는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기계적인 출근을 하고 그 안에서 상대방을 밟고 올라가야만 살아남는 잔인한 구조에 떨어지게 된다. 그것이 정말 내가 원했던, 혹은 나를 위한 싸움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 너덜너덜 투쟁을 하고 지친 몸을 끌고 돌아온다. 집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먹는 입(食口)’들이 노동의 대가인 돈으로 음식을 먹고 배불러 지지배배 댈 때 비로소 야릇한 성취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 허보리와 남편이 삽질해서 얻은 ‘전리품’으로 4인 가족이 먹고 산다. 그런데 열심히 삽질하여 얻어진 ‘붉은 고기 덩어리’는 ‘그림의 떡’이다. 그리고 ‘붉은 고기 덩어리’가 올려질 식탁은 ‘삽탁’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한 삽질은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행하는 ‘헛 삽질’이었단 말인가? 와이? 왜 허보리는 식구를 위해 열심히 행한 삽질을 ‘헛 삽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 점에 대해서는 필자가 앞에서 인용한 <부드러운 M4>에 관한 허보리의 진술에서 암묵적이나마 알려줄 것 같아 재인용해 놓는다.

“나는 인간의 삶 속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어디든 존재하는 승리의 구조를 그저 상대를 죽이고 말아야 끝나는 ‘전쟁’의 모습으로 설정을 하고 작업을 하였다. 직장에서의 상징적인 의상인 정장, 양복으로 실제 사용되고 있는 무기들을 만들었다. 검은색 정장 바지 한 벌은 개인화 무기인 M4소총으로 만들었고 그 안을 물렁한 솜으로 채워 연약한 질감으로 쓸모없어지게 함으로써, 이 모든 애타는 승리를 향한 노력들이 부서진 파도 같은 허무함으로 보이게 하고 싶었다.”

필자는 지나가면서 허보리의 <부드러운 정물>을 언급하면서, 허보리가 ‘바니타스 정물’에 화려한 황금액자를 끼운 것을 힘들고 고된 나날을 보내는 관객에게 ‘희망의 총’을 쏘는 것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허보리의 <부드러운 N4>나 <클래식 수류탄> 그리고 <채끝살 니들 드로잉>은 관객에게 ‘헛 삽질’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허무적인 작품은 우리들이 매일 반복해서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헛 삽질’만 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할 수 없다. 우리는 다시 일어선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삶에 대한 긍정’ 때문이다. 그렇다면 허보리의 작품은 우리 삶에 대한 ‘풍자-거울’이 아닌가?

 

 

 

 

허보리의 ‘바니타스_미러(Vanitas_Mirror)’

 

 

류병학 미술평론가

허보리는 스페이스몸미술관 1전시장에 두 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부드러운 M4>와 <부드러운 정물>이 그것이다. <부드러운 M4>가 오브제 작품이라면, <부드러운 정물>은 회화다. 우선 허보리의 <부드러운 M4>를 보도록 하자. 그것은 백색 벽면에 설치한 백색 선반 위에 M4 카빈(Carbine)을 비치한 작품이다. 인터넷에서는 M4 카빈을 22구경이라 반동이 적고 탄도 특성도 좋고 탄값도 저렴해 남녀노소 부담 없이 갖고 놀기에 좋은 소총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M4 카빈이 미국에서 종종 벌어지는 총기난사 사건에 등장하는 미국 자동소총의 대명사라는 점에서 ‘놀기’에 좋은 소총이란 말을 무색하게 한다.

그런데 허보리는 ‘검은 악의 축’으로 불리는 M4 카빈을 갖고 ‘놀기’에 좋은 ‘부드러운’ 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를테면 그 ‘부드러운’ 소총은 블랙 슈트 한 벌을 가지고 M4 카빈 소총을 모델로 제작한 작품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허보리의 ‘M4’는 일명 ‘그림의 떡’, 즉 살상의 기능을 박탈한 ‘부드러운’ 작품인 셈이다. 그녀의 ‘부드러운’ M4 소총은 무엇보다 방아쇠를 당긴다 하더라도 총알이 날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탄창을 갈아 끼울 수 없으며, 목표물을 조준할 때 꼭 필요한 가늠자와 가늠쇠가 ‘무늬’만 가늠자와 가늠쇠일 뿐이고, 총열마저 ‘거세’된 듯 밑으로 쳐져있다. 그렇다면 허보리의 <부드러운 M4>는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부드러운 M4>에 관해 허보리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나는 인간의 삶 속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어디든 존재하는 승리의 구조를 그저 상대를 죽이고 말아야 끝나는 ‘전쟁’의 모습으로 설정을 하고 작업을 하였다. 직장에서의 상징적인 의상인 정장, 양복으로 실제 사용되고 있는 무기들을 만들었다. 검은색 정장 바지 한 벌은 개인화 무기인 M4소총으로 만들었고 그 안을 물렁한 솜으로 채워 연약한 질감으로 쓸모없어지게 함으로써, 이 모든 애타는 승리를 향한 노력들이 부서진 파도 같은 허무함으로 보이게 하고 싶었다.”

자, 이번에는 허보리의 <부드러운 정물>을 보도록 하자. 그것은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일종의 ‘정물화’이다. 그런데 그 정물화에 그려진 사물들이 한결같이 군인이 사용하는 철모에서부터 수류탄 그리고 탄피들과 탄약통 또한 칼과 물통에 이르는 군용품들이 아닌가. 그런데 당신이 그 사물들을 다시 한 번 본다면, 그 이미지들이 실재 군용품들을 모델로 삼아 그린 것이 아니라 각종 천으로 제작된 오브제를 모델로 삼은 것임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허보리의 <부드러운 정물>은 ‘부드러운 무기들’을 재구성한 정물화라고 말이다.

흥미롭게도 허보리는 ‘무기’들과 이질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화려한 황금액자에 ‘정물화’를 끼워 넣었다. 와이? 왜 허보리는 ‘부드러운 무기’들을 그린 그림에 화려한 황금액자를 끼운 것일까? ‘정물화’는 움직이지 않는 정지한 사물을 그린 그림(靜物畵)을 뜻한다. 정물화는 영어로 ‘스틸 라이프(still-life)’로 표기되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정지된 삶’을 뜻한다. 그리고 정물화는 프랑스어로 ‘죽은 자연’이라는 뜻을 지닌 ‘나튀르 모르트(nature morte)’로 표기한다. 정지된 삶? 죽은 자연? 허보리의 진술을 직접 들어보자.

“인간의 삶 속에 어디든 존재하는 승리의 구조는 ‘전쟁’의 연속으로 보였다. 현대인의 일터에서 상징적인 의상인 양복으로 실제 사용되고 있는 무기들을 부드러운 질감으로 만들었다.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 화풍 중 하나인 바니타스의 양식과 그 화풍의 일관된 주제였던 ‘인생의 허무함‘을 빌어 패러디한 작업이 <부드러운 정물>이다. 그동안 만든 여러 무기들로 피테르 클라스Pieter Claesz(1598 -1660)의 작품<Vanitas' Still life>의 구도와 빛의 느낌을 그대로 연출해본 작업으로 그 당시 화풍의 일관된 주제였던 ‘인생의 허무함(Vanitas)‘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허보리의 <부드러운 정물>은 피테르 클라스(Pieter Claesz)의 <바니타스 정물(Vanitas' still life)>(1630)을 패러디한 정물화라고 한다. ‘바니타스(Vanitas)’는 라틴어로 ‘헛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서구에서 정물화는 흔히 ‘허무한 삶’이나 ‘인생무상’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티벳은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윤회의 과정으로 본다. 이를테면 죽음은 다시 태어나기 전에 거치는 한 과정이라고 말이다. 티벳처럼 죽음을 두려운 것이 아닌 다른 시선(?)으로 보는 것을 일컫는 말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있다.

라틴어 메멘토(memento)는 ‘기억’ ‘경고’ 등을 뜻하고, 모리(mori)는 ‘죽음’을 뜻한다. 따라서 메멘토 모리는 ‘죽음의 경고’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을 뜻한다. 결국 ‘죽음을 기억하라’는 격언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성찰, 즉 삶의 성찰을 뜻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허보리의 <부드러운 정물>은 우리에게 ‘죽음을 기억하라’, 즉 ‘인생무상’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와이? 왜 그녀는 삶을 허무한 것으로 보는 것일까? 왜 그녀는 허무한 삶을 무기에 비유한 것일까? 혹 그녀는 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을 마치 끔찍한 ‘전쟁터’ 같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허보리는 왜 ‘허무한 삶’에 화려한 황금액자를 끼운 것일까? 언 듯 보기에 ‘황금액자’와 ‘바니타스 정물’은 서로 이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허무한 삶’은 ‘화려한 삶’을 전제한다. 이를테면 회화에 액자가 없다면 ‘앙꼬 없는 찐빵’이듯이 허무한 삶에 화려한 삶이 없다면 ‘희망 없는 삶’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희망을 꿈꿀 자격이 있다. 그렇다면 허보리가 ‘바니타스 정물’에 화려한 황금액자를 끼운 것이 다름 아닌 힘들고 고된 나날을 보내는 관객에게 ‘희망의 총’을 쏘는 것이란 말인가?

2015.9

허보리

무장가장(武裝家長)

 서준호

 

여자가 남장을 하는 데 필수적인 요건이 넥타이를 매는 것이다.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는 것 자체가 남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며 수많은 남성 가장들이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아침마다 직장으로 나선다. 허보리 작가는 그런 남성 가장들이 마치 전투를 하러 집을 나서는 것 같다고 한다. 삶이 치열한 전쟁 같은 점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양복을 입든 안 입든 마찬가지지만 작가는 남성의 아이콘인 넥타이와 양복을 소재로 만든 무기를 통해 삶의 치열함을 드러낸다.

삶의 고달픔, 치열함에 대한 고민은 애초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에나 등장할 법한 중세 방패와 칼을 입지 않는 양복과 넥타이 제작으로 드러났다. 어린 남자아이들이 어느 나이가 되면 좋아하게(환장하게) 되는 칼과 같은 중세 판타지물의 전투 아이템을 통해 경쟁으로 점철되는 현대인들의 상황을 드러내는 작업에 이어 작가는 판타지적인 면을 제거하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실제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실제 사이즈의 반으로 축소한 탱크와 실제 사이즈인 M4와 M2 자동소총 그리고 M2에 쓰이는 탄과 탄통, 여러 가지 고폭탄과 수류탄을 넥타이와 양복천으로 정교하게 제작해 누구든 작품을 들고 군인 흉내를 내고 싶도록 만든다.

이런 무기를 작가는 실제로 경험한 적이 없다. 대신 용산전쟁기념관을 드나들며 전투기, 그리고 탱크를 종일 스케치했다. 무시무시한 살상력을 지닌 전투기나 전투함이 안보 산업과 군비 경쟁으로 상징되는 국가 체제를 함의한다면 백병전을 하듯 살고 있는 일상의 ‘武裝家長’은 대량 살상무기보다는 개인화기가 더 잘 어울린다. 그리하여 개인화기에 대한 연구 결과가 그의 드로잉 작업으로 이어진다. 군인들이 사용하는 무기들을 접한 적 없는 작가는 실물 사이즈 프라모델 소총을 조립하며 구조를 연구했고 인터넷에 나오는 무기 사이트와 전문 블로그, 밀리터리 매니아들의 쇼핑 사이트 이미지를 면밀히 연구했다. 심지어는 국방부 홈페이지를 뒤져 민원실로 전화해 무기화사단을 방문해 155밀리미터 백린탄을 보고 싶다는 뜻을 전했지만 복잡하고 여의치 않은 상황 때문에 실제 방문을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런 여러 학습 과정을 거침으로써 작가는 제원과 더불어 무기의 역사까지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M34 백린탄은 누가 어디서 누구에게 사용하였는지, 어떻게 사용하며 어떻게 구성되는지 드로잉과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만드는 작업을 통해 군대를 경험한 남성들 보다 더 무기와 밀착되는 경험을 거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무기를 체화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 사이즈이나 사용할 수 없는 말랑말랑한 무기를 손으로 만드는 작업은 어쩌면 치열한 현실에 대한 무기력을 드러냄과 동시에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폭력적인 체제의 핵심을 거세시킨다. 탱크와 자동소총의 포신과 총구는 힘없이 구부러져 있다. 공격적으로 뻗은 총의 남성적 이미지는 허보리의 다독이는 손길과 여성적 시선 아래 부드러운 곡선과 말랑말랑한 촉감을 얻는다.

넥타이와 양복을 해체하고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로 여겨지는 바느질을 치열하게 수행한 작업은 남성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느끼는 양가적인 감정을 담는다. 당연하게도 허보리의 이런 작업이 총구 위에서 죽음을 건 경쟁에 내몰린 이들을 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이러한 현실을 되돌이켜보는 기회를 만들 뿐만 아니라 나아가 길고 부드러운 포옹처럼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역할을 해낸다. 남성들이 수행하는 전쟁에 쓰이는 무기에 맞서 천과 바느질이라는 재료로 이루어낸 수고로운 노동은 인간이 파멸적 도구만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님을 역설한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무역센터가 무너진 지 14년이 되었다. 이후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2014년 12월 비로소 끝이 났다. 그러나 여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고 허보리 작가가 다룬 오리지널 무기들이 살상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양복을 입은 ‘제1의 성’이 전쟁을 만들고 돈을 돌리고 금융을 장악하고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 세계를 명확하고 냉정하게 보아야 함은 당연하다. 허보리의 말랑말랑하지만 정교한 양복 무기들은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애통하고 잔인한 면에 생각을 미치게 만든다. 이 세계는 약육강식과 비정이 판치는 세계이지만 우리는 가냘픈 촛불이 일렁이듯 본능과 파괴에 맞서 평화와 부드러움을 옹호해온 이들을 안다.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면 바로 그 작고 가냘픈 부드러움에 바쳐져야 하는 것 아닐까.

 

Sep. 2015

Armed Breadwinners of Boree Hur

Juno Seo

 

 

The must-wear item for a woman to dress up like a man is a necktie. Wearing a necktie and a nice suit is the icon that symbolizes men, and so many male breadwinners wear a necktie and a suit and off to work they go every morning. Whether it be to men or women, wearing a suit or not wearing a suit, life is like a fierce war to all but the artist attempts at revealing how fierce life is by making weapons out of neckties and suits which are the icons of men.

The concerns over tough and fierce life were displayed in the form of medieval shields and swords made out of no-longer-worn neckties and suits that would probably appear in online role playing games. The lives of the modern people plagued with competition is shown through the use of weapons in medieval fantasies like swords that little boys get interested in (or go crazy over) at a certain period of time. Then on, the artist eliminates the element of fantasy and creates weapons that are used in real wars that take place even today. Delicately made tank reduced to half the real size and real-sized rifles M4 and M2, bullets and cases, various high explosives and grenades using clothes from neckties and suits make just about anyone want to hold them in the hand and act like soldiers.

In fact, the artist has no experience with such weapons. Instead, she frequently went to the War Memorial of Korea and made sketches of fighter jets and tanks all day. If the fighter jets and tanks with fearsome killing power refer to a nation’s system symbolized by competition within the security industry and arms race, then rather than weapons of mass destruction, private weapons are more suitable for ‘Armed Breadwinners’ who live every day of their life as if engaged in a hand-to-hand combat. And therefore, the results of researches on private weapons are translated to her drawings. Since the artist has never experienced weapons soldiers use, she studied the structure by assembling a real-size plastic model gun, and thoroughly studied online websites and blogs related to weapons as well as online shopping malls of military maniacs. The artist even rummaged through the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online, called the Office of Civil Service to express that she wanted to visit the arsenal to take a look at the 155 mm White Phosphorous, but unfortunately she could not pay visit because the army base was in Gangwon-do and of some complicated process. Repeating the course of research over and over again, the artist learnt of the history of weapons in addition to the components of the weapons such as who and where and to whom M34 Wite Phosphorous was used, how you use it and what it is composed of. Through the extensive work of drawing and completing the work stitch by stitch, she goes through the process of growing closer to the weapons than men who have experience with the military. In other words, she gets to 'embody' the weapons. Perhaps the work of creating actual-size weapons that are way too soft to do any harm exhibit helplessness against reality as well as castrate the core of the violent system created by men. The cannon and the gunpoint of the tanks and rifles are bent helplessly. The masculine image of the gun pointing outward aggressively obtains soft lines and textures under the tender feminie fingers and eyes of Boree Hur.

The artist’s work of dismantling neckties and suits, reassembling them with delicate stitches, which are considered to be women’s work, contains the feeling of ambivalence, of living together with men. Of course, such work of Boree Hur cannot save the people who are driven out to life-staking competitions at gunpoint. However, her work provides us with the opportunity to reflect on the reality we are in, and furthermore, consoles exhausted souls like a long-lasting and soft embrace. Against the weapons men use in war, the painstaking labour performed with clothes and needles strongly argues that humans can make something other than destructive tools as well.

It has been 14 years since the collapse of the World Trade Center of New York in Sept. 11, 2001. The war in Afghanistan that followed swiftly was finally brought to an end in December 2014. Still, war is raging in countries such as Israel, Palestine and Syria, and the original weapons artist Boree Hur used in her works are being used to kill lives. ‘The first sex’ creates war, circulates money, dominates finance, and is controlling the world. Maybe it is only natural to view the world with objective and cold eyes. The soft but delicate suit weapons makes us realize the brutal and deplorable side of the world men has made. Despite the fact that we are living in a world dominated by the brutality and the survival of the fittest, we know of people who went against their nature and destruction as if the shaking flame of faint candlelight, and protected peace and tenderness. If there is greatness to humans, wouldn't it be that very small and faint tenderness?

2014.12

허보리의 마음의 풍경 :

과열된 ‘광장 휴머니즘’을 식히는 미적 기제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진실하면 나는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더욱이 개인적이고 살아있는 것이면 나는 더 힘찬 박수를 보낸다.”

-에밀 졸라(Émile Zola)

 

 

1.

 

허보리는 더 이상 광장으로 가지 않는다. 그의 회화는 광장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춘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마음의 방’으로의 방향선회가 있은 후부터, 선동이나 소란스러운 웅변의 범주 밖으로 벗어난 때부터, 그의 붓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 등장하는 것들은 그래서 광장의 부산물이거나 교차로에서 가져온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마음을 구성하는 것들이다. 시선의 뒤 안으로의 물러섬과 더 가깝게 결부된 것들이고, 살아있음의 흐름이 더 잘 감지되는 것들이다.

 

마음의 방은 어떤 곳인가? 작가는 말한다. “어둠 속의 백열등 빛”이나 “물에 번지는 잉크”처럼 점진적이며 은은하게 흐르는 흐름이 있는 곳이라고, “연기나 향기” 알갱이들처럼 대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존재의 기운들과 대면하는 곳이기도 하다고! 그곳에서 작가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풍경을, 잉크처럼 번지는 흐름과 실존입자들의 부유를 그리고 또 그린다. 작가는 처음부터 이 보이지 않는 풍경만을 취급해 왔다. 그에게 마음에 의해 그려진 것이 아니며, 따라서 마음을 담겨있지 않은 풍경은 신앙심이 결여된 종교 회화, 충성심이 결여된 군주의 초상화와 같은 것이다. 코로[(J.-B. Camille Corot)의 회화에 대한 테오필 토레(Theophile Thore)의 비평이 떠오르는 게 결코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 “코로는 언제나 단 하나의 똑같은 풍경밖에 그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화가다.󰡓 허보리의 세계에서는 마음을 다룰 때에만 진정한 풍경화가 된다. 마음이 배제된 풍경, 그 안으로 몸을 숨기고 싶은 마음의 방이 부재하는 풍경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다. 멋진 가로수 길과 황혼의 강렬한 색조만을 앞세우는 풍경화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작가가 자신이 그리는 풍경의 밖에 위치해 있는 풍경은 감상용 눈요깃거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풍경으로 나아갈 수 없다.

 

허보리의 마음의 풍경은 “한 개인의 침범당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새삼 부각시킨다. 마음이 침범당해 타인들과의 간격과 거리가 허용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스위스의 데이비드 시그너(David Signer)가 “열대성 휴머니즘”으로 명명한 덫, 보드리야르가 ‘소통의 황홀경’으로 짚은 상황, 곧 사람들의 관계가 지나치게 뜨거워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사람들 사이의 적절한 거리가 확보되지 못해 구성원들이 모방욕망, 경쟁, 열정, 질투심, 원망 등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전체성과 폭력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거리의 폐지와 그로 인한 과열된 관계와 과잉 소통이야말로 포스트모던적 자아의 전형적인 특성이다. 그런 자의식은 피로감의 엔트로피와 폭력성의 증폭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허보리가 부단히 탈주를 기획하지 않을 수 없는 ‘과열된 휴머니즘’이요 ‘광장의 선동’인 것이다. 작가는 숨고, 도망치고, 달아난다. 작은 나무인형에 문을 달고, 그 안으로 들어가 한 동안 틀어박혀 있는 것을 꿈꾼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지 않는 대수롭지 않은 나무 숲으로 숨어버릴까 궁리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스마트폰을 버리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리라고 다짐한다. 작가는 이렇듯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는 곳들을 그려왔다. 때로 그것은 버려진 종이박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회화는 단지 숨을 곳을 그려넣는 공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회화 자체가 숨는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마음의 풍경은, 그리고 회화는 과열된 휴머니즘을 냉각해 그 체제의 전복을 꾀하는 미학적 기제인 것이다.

 

마음은 비록 연약하고 상처받기 쉽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전체성의 체계에 공포를 야기시킨다. 미메시스적 욕망을 넘어 진정한 ‘한 사람 성(性)’, 깊이 있는 개인성을 담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혁명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마음의 풍경을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시키고 자신을 유배지화 하는, 베이컨적 의미의 동굴의 우상에 매몰되는 것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광장의 우상, 모방욕망과 질투심으로 뜨거워진 포스트모던적 파토스의 위험을 인식하고,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필연적인 시도다.

화가가 도시의 군주나 수행원이 아니라 “마음의 포수(捕手)”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회화는 도시를 우회하고 광장을 가로질러 마음으로 가는 미적 여정이어야 한다. 도시를 건설하고 광장을 정복하는 것은 폭력과 약탈을 동반하며, 따라서 군주나 정치가의 관심사일 순 있어도 예술가의 길일 수는 없다. ‘마음으로 난 길’이 예술가가 걸어야 할 길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허보리의 회화론은 “타자와의 폭력적인 근접성과 무차별화”에 매몰되는 이 시대의 위험을 우회적으로 폭로하고 전복시킨다. 지체없이 마음을 향해 선회함으로써, 과열된 ‘광장 휴머니즘’과 ‘도시의 전체성(Totality of the city)’에 대한 안티테제를 수행하는 것이다.

 

 

 

2.

 

테크닉의 면에서 보자면 20세기 미술은 거칠고 동물적인 미술이다. 묘사와 해석이 아니라, 곧바로 행동으로 돌입한다. 화가들은 묘사되는 대상을 배제하는 유행에 대거 가담했다. 마네는 재료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회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앙드레 말로도 모델이 아니라 재료에 몰입하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허보리는 그 데카당한 충고를 더 이상 따르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에게 매체로서 회화, 재료로서 안료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대상이나 모델, 내용을 희생양으로 내몰 필요는 없었다. 회화든 재료든 기법이든, 마음의 방을 담는 그릇이거나 그 자체가 될 때에만 의미를 지닐 뿐, 그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허보리에게 대상이나 모델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 사물의 외적 특성을 파악하고 재현하는 것이 최우선하는 고려사항은 아니더라도, 사물들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그것들은 ‘대상으로부터 충분히 독립적인 회화’를 입증하는데 목적이 있는 모더니즘 미학으로 포괄될 수 없다. 작가는 오히려 사물에 심리극적인 역할을 부여해 의인화한다.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일종의 배우(俳優)로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매개체다. 그에게 사물들은 세잔느적 의미의 정물(靜物)이나 뒤샹적 의미의 개념-오브제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들은 연출자가 할당한 배역을 연기해야 한다. 그 역할이 활성화되는 동안 사물들은 사물 자체이기를 중단한다. 바닥에 어질러진 약병은 쇠약해진 심신을 의미한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스마트폰은 과도한 소통으로부터의 탈주라는 의미를 지속적으로 생성해낸다. 닫힌 문이 달린 상자, 사다리 없는 높은 집, 집무성한 수풀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싶은 지친 영혼을 비유해낸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우거진 숲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길 잃은 막막한 마음”을 소개한다. 한 때 그렸던 소시지 더미는 존재를 탈진시키는 폭력적이고 부담스러운 일과를 의미했었다.

 

최근작들에선 “두툼하고 볼륨있는 수채 붓”이 등장하고, 상황들은 자주 “닫혀있는 방”이나 “앞이 보이지 않는 우거진 숲”에서 전개된다. 그것들은 여전히 의인화된 작가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마음의 풍경이다. “탐스러운 머리칼과 든든한 몸통, 쭉 뻗은 다리”를 지닌 수채 붓은 작가의 욕망과 꿈과 고통을 대변한다. 그의 분신인 붓은 분홍빛 연기를 내뿜으며 초현실적인 풍경을 만든다. 그렇듯 마음은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도피된 일상, 실존과 상상된 탈실존의 경계를 분주히 넘나든다. 그 각각의 경험은 그것을 통해 획득된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매개한다. 사방이 밀폐된 하얀 방도 두툼하고 볼륨있는 수채 붓과 같이 의인화된 공간이다. 흰색은 때 묻기 쉬운 색이요, 흰 방은 “침범당하기 쉬운” 장소다. 그림들은 각각의 창백한 불안을 품은 채 아직 그려지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정작 바닥의 흰 카펫에는 큰 얼룩이 번져나가고 있다. 《마음의 점》은 회화라는 고통스러운 침묵에 대한 도상학적 해석을 내포한다. 회화는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 질문을 더 극단으로 몰아갈 뿐이다. 그 통증에 의해 마음은 쉽게 얼룩진다. 그리고 화가는 그렇게 생긴 얼룩들에 의해서만 마음의 풍경을 그릴 준비를 마칠 수 있다.

 

마음의 포수는 마음이 거하는 곳, 인간이 피어나고 시드는 존재성의 내밀한 산실(産室)을 향해 매순간 방향을 선회한다. 허보리의 마음의 풍경은 충분히 초현실적이지만 위협적일만큼 낯설지는 않다. 데자 뷔(déjà vu), 또는 언젠가 적어도 한번은 그곳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곳의 어떤 특성이 우리 모두의 보편적 욕망과 더 보편적인 불안, 그리고 모호한 희망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허보리가 그의 마음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틀림없이 더욱 낯설어 보일 그곳을 스케치해내는 만큼,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013.7

허보리

철학하는 그림, 사물과 유희(遊戱)의 스토리텔링

 

안현정 미술평론가

“인간의 모든 상태 가운데 오직 유희만이 인간을 완전하게 하고 천성(天性)을 발전시킨다.

그리고 그것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 - 쉴러의 ‘유희충동(遊戱衝動)’

허보리는 감수성이 남다른 작가다. 그는 눈에 띈 사물을 그대로 지나치는 법이 없다. ‘마치 ~와 같다’는 비유적 표현이 작품의 뿌리를 이루고, 그가 처한 상황과 감정이 줄기가 되어 스토리를 만든다. 어린 시절 넋을 놓고 바라보던 동화 속 이야기처럼, 그의 비유는 놀랍도록 해맑고 유쾌하다. 주전자의 밑바닥을 닳고 닳도록 닦아냈다던 작가의 어머니는 허보리가 사물을 의인화하는 첫 번째 모티브를 제공해 주었다. 주전자는 작품으로 환원되면서 뜨겁게 달아오른 불 위에서 시뻘겋게 달궈진 엉덩이를 갖게 된다. 조금이라도 뜨거워질라치면 크게 소리를 내어 지를 것 같은 수다스러움까지 느껴진다. 작가는 명랑한 웃음을 자아내는 ‘유희’라는 도구를 통해 나약한 인간존재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에 도전장을 던진다. 유희에는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신뢰가 깔려있음을 인지한 까닭이다.

사물과 유희의 스토리텔링은 계속 이어진다. 책상 위에 쌓여가는 소시지, 식탁을 화분삼아 끊임없이 자라는 채소들, 침대 밖으로 삐져나온 말미잘 형상의 개체들과 의자 사이로 솟아나는 꽃이 핀 나뭇가지, 남과 여로 분장한 케첩과 마요네즈 등. 변형되고 쌓여가는 형태들은 인간에 의해 거세당한 사물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불완전한 사고의 군집을 대변한다. 이러한 작가의 사유과정은 사물을 관찰하는 단계(정체성에 대한 고민)에서, 작품에 감정을 이입하는 단계(새로운 생명체의 창조)로까지 이어진다. 현실상황 속에서 확장된 비현실의 모티브들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꽉 닫혀 있던 우리의 머리를 자유롭게 해방시킨다.

작가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공간사이의 긴장관계로까지 대상을 확대하고 있다. 르네 마크리트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즉흥적 기법(Depaysement:어떤 대상을 일시적인 환경에서 떼어내 이질적인 환경에 놓음)을 통해 기이하고 낯선 상황을 연출했듯이, 작가는 도시공간․자신의 방․작업실․산과 바다 등에 자신의 감정이 비유된 사물(연필․캔버스 등의 화구, 휴대폰, 주변에 산재한 각종 음식물 등)을 위치시킴으로써 유희의 효용에 사유의 자유로움을 더하고 있다. 방안에 꽉 차버린 산, 버려진 휴대폰, 알에서 태어나 힘겹게 등산하는 캔버스, 침대와 소파 위에 널부러진 음식 등. 이 모든 것은 창작의 메마름을 호소하는 작가 자신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작가는 오늘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물에 생명이 있음을 인지한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사물의 편’에 서서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bottom of page